진잠군(鎭岑郡)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과 서구 관저동, 가수원동 중심으로 대전광역시 서남부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는 충청도 공주목 유성현에 속하였고, 고종 32년(1895) 진잠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대전군에 편입되었다.
개요
진잠의 잠(岑)은 작지만 높이 솟은 산을 의미하는데, 구봉산의 바위 봉우리를 뜻한다.[1] 진잠군은 조선시대에는 회덕현, 유성현과 공주목에 속하여 있었으며, 고종 32년(1895) 지방행정 제도의 개편으로 진잠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재 진잠초교 근처에 진잠현 관아터가 있었다고 추정된다.[2]
영역
역사
- 원내동과 세동 일대에 선사시대 인류의 거주흔적이 발견되었다. 대정동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존속하여 백제의 지배하에서 소국체제가 계속되었다.
- 백제시대에 진잠동은 진현현(鎭峴縣)이 설치되었다.
- 660년 백제가 패망하여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계룡산의 동쪽에 자리잡은 진현성을 거점으로 저항하였지만, 당나라의 유인원, 유인궤에 의하여 복신등이 패함으로써 최후를 맞았다. 진현성은 동,서,북면이 두마천에 둘러쌓인 흑석동, 용촌동에 위치한 산성이다.
- 고려시대에 진잠현으로 개명되었다. 이시기부터 진잠(鎭岑)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계산동(鷄山洞)에 고려청자 도요지가 운영되었다.
- 1895년 23부府제로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현(縣)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군(郡)으로 승격되어 공주부관할 진잠군이 되었다. 이듬해 충청도가 남북도로 분할된 채 부활하여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일제에 의한 행정폐합으로 대전군에 합병되어 진잠면과 기성면으로 분단되었다. 현재의 진잠동과 계룡시 신도안면은 진잠면이 되었다. 기성동, 가수원동, 관저동일대는 기성면이 되었다.
- 1983년 진잠면 전역이 대전시 중구관할 유성 출장소에 편입되었다.
- 1988년 대통령령 제12367호(1987. 12. 31 공포)로 충청남도 대전시 서구가 신설되면서 유성 출장소의 관할 구가 서구로 변경되었다.
- 1989년 행정동이 진잠동과 원내동으로 분리되었다.
- 1995년 동 명칭이 진잠 1,2동으로 변경되었다.
기록
이중환의 택리지에 진잠현은 동서의 두 산이 남쪽에서 평야를 끼고 돌아 북쪽에 이르러서 합치었고, 또 높게 사방을 산으로 막아 가운데를 둘러쌌고, 평평한 언덕과 산은 길고 구불구불하고, 구봉산과 보문산이 남쪽에 높이 솟아 그 맑고 깨끗한 기상이 거의 한양의 동교보다 낫다고 기록되어 있다.[3]
유적
대전과 연산을 잇는 길이 지나가는 성북동 산성과 진잠 향교가 현재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성북 산성등 역사 유적지가 산재되어 있다.
같이 보기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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