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은언군의 서자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 1785년 4월 29일(음력 3월 21일) ~ 1841년 12월 14일(음력 11월 2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자 농민이며, 철종의 생부이다. 장조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였다. 이복 형 상계군과 아버지 은언군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어 빈농으로 생애를 마쳤으며, 한때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다. 1820년과 1822년, 1826년 일시 석방되고 1830년 석방되어 도성에서 살 수 있었다. 은언군의 서자라 평생 품계와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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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계대원군 全溪大院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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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원군 | |
이름 | |
휘 | 이광(李㼅) · 이쾌득(李快得) · 이해동(李海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85년 3월 21일(1785-03-21) (음력) |
사망일 | 1841년 11월 2일(1841-11-02)(56세) (음력) |
부친 | 은언군 |
모친 | 전산군부인 이씨 |
배우자 | 완양부대부인 최씨, 용성부대부인 염씨 |
자녀 | 3남
회평군, 영평군, 철종 |
철종 즉위 후 순원왕후의 명으로 은언군, 상계군 관련 일성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젊은 시절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삼으려던 일로 이복 형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연좌되어 강화도로 가게 되었다. 천극죄인 신분으로 거주지에 가시울타리가 쳐지고 계속 감시당했으며, 이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였다. 이복 형 이성득이 고문치사한 일을 계기로 순조는 1822년 은언군의 자녀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하였고, 이때 성인식인 관례를 올렸다. 그러나 다시 강화도로 끌려갔고 1826년 노비 신분으로 격하되어 충청도 온양에 정속되었다가 그해 임시 석방되었다. 1830년 최종 석방되면서 한성부로 와서 생활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소실 중 한명인 염씨에게서 얻은 셋째 서자 원범이 1849년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군호를 의망하여 전계군(全溪君)의 작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대원군으로 추봉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경기도 강화군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 휘는 이광(李㼅), 자는 창강(昌康), 초명은 이쾌득(李快得), 이해동(李海東)이다. 강화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