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니 리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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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잔니" 리베라(이탈리아어: Giovanni "Gianni" Rivera, 1943년 8월 18일, 피에몬테 주 알레산드리아 ~)는 이탈리아의 정치인이자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에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는 축구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되었다.
조반니 리베라 Giovanni River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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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8월 18일(1943-08-18)(80세)[1][2]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1][2] |
성별 | 남성 |
직업 | 축구 선수 (은퇴), 정치인 |
소속 | 기독교민주당 (1987–1994) 센니조약당 (1994–1996) 민주당 (1999–2002) 마르게리타당 (2002-2007) 민주중도당 (2013) |
키 | 1.75m[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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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정보 | ||||||
포지션 |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2] | |||||
구단 기록* | ||||||
연도 | 구단 | 출전 | (득점) | |||
1959–1960 | 알레산드리아[2] | 26 | (6) | |||
1960–1979 | 밀란[1] | 501 | (122) | |||
국가대표팀 기록 | ||||||
1962–1974 | 이탈리아[4][5] | 60 | (14) | |||
* 구단의 출전횟수와 득점기록은 정규 리그의 공식 리그 경기 기록만 집계함. |
대중 매체에서 이탈리아의 금빛 소년(ragazzo d'oro)으로 수식되는 그는 현역 시절 대부분을 이탈리아 거함 밀란에서 보냈고, 신고식은 1959년에 고향 알레산드리아에서 치렀다. 1960년에 밀란에 합류한 리베라는 국내와 유럽 무대에서 모두 큰 성공을 거두며 3번의 세리에 A 우승과 2번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비롯해 여러 대회를 제패했고, 12년 동안 구단의 주장을 역임했다.
리베라는 국가대항전에서 이탈리아를 대표로 1962년부터 1974년까지 60경기를 출전해 14골을 기록했고, 4번의 월드컵(1962년, 1966년, 1970년, 그리고 1974년)에 참가했다. 리베라는 4-3으로 이긴 서독과의 1970년 월드컵 준결승 세기의 경기에서 승부처에 득점을 기록해 결승행을 견인했지만, 브라질에 1-4로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리베라는 1968년에 이탈리아 안방에서 열린 유럽 선수권 대회의 우승 주역이었고, 로마에서 열린 1960년 하계 올림픽에도 이탈리아를 대표로 참가해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6]
리베라는 우아하고, 효율적이며, 창의적인 공격적 플레이메이커로도, 골 냄새를 잘 맡았고, 시야도 넓었고, 기술적으로 출중해, 축구 지능, 지도자 역량, 올곧음, 그리고 품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7] 그는 정확한 공넘김과, 공을 돕는데 최적화된 경기 방식으로 공넘김이 가장 유능한 선수로 평가되며, 역대급 재능을 소유한 최고의 공격형 플레이메이커로도 회자된다.[8][9][10] 당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며, 이탈리아 축구 역대 최고로 손꼽히는 선수이기도 하며,[11] 혹자는 이탈리아의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12][13][14] 1969년에는 발롱도르를 거머쥐었고,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는 그를 20세기 세계 최고의 선수 득표율 19위를 기록했다.[15] 2015년, 그는 이탈리아 선수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스포츠 명예의 거리에 헌액된 최초의 선수로, 타 종목의 99명과 함께 이름이 올랐다.[16] 2004년, 펠레는 리베라를 살아있는 최고의 선수 목록인 FIFA 100에 올렸고,[17] 유럽 축구 연맹 50주년 여론 조사에는 그의 이름이 35위에 올랐다.[18]
1979년에 현역에서 은퇴한 리베라는 밀란의 부회장을 역임하다가 1987년에 정치에 입문했다. 2013년,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는 그를 로베르토 바조와 아리고 사키와 함께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유소년 교육 회장으로 임명해 체사레 프란델리 감독을 도왔다.[1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