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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조선귀족)
중추원 의장, 의정부 찬정, 외부대신, 법부대신, 중추원고문,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 자작, 연합연설회가 법조인의 악한 행동 대표로 법부대신 이하영을 고소함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하영(李夏榮, 1858년 8월 15일 음력 6월 25일 ~ 1929년 2월 27일)은 조선 말기의 통역관, 외교관이자 대한제국의 정치인, 일제강점기의 기업인으로 일제로부터 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대표적인 매국노이자 민족반역자. 몰락한 소론계 양반으로 소싯적엔 찹쌀떡 행상과 동자승으로 전전했다. 1876년 부산이 개항되자 일본인 상점에 취직해 어깨너머 일본어를 배웠고, 1884년 장사를 하려다 사기를 당한 직후 선교사 알렌을 만나 그의 요리사 자격으로 미국공사관에서 일했다. 얼떨결에 갑신정변에 휘말린 그는 민영익을 간호한 인연으로 1886년 외무아문 주사에 임용됐고, 곧 이등 서기관으로 1886년 초대주미공사 박정양과 미국공사관에서 근무했다. 1889년 귀국할 때는 정밀한 철도 모형을 갖고와 미국이 철도 부설 등 이권에 참여하고 싶어한다는 뜻을 전했다.[1] 귀국 후 웅천현감(熊川縣監), 흥덕현감(興德縣監), 외무아문 참의, 한성부 관찰사를 지냈다. 1896년(건양 1년) 주일본공사관 전권공사,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이 되고, 이듬해 다시 주일공사관 전권공사로 파견됐다. 이후 의정부참정, 외부대신을 거쳐 법부대신에 임명됐다.[1] 법부 대신으로서 을사 보호 조약 체결에 서명한 을사삼흉이며 이어 중추원 고문이 됐다.
이하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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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 | |
후임 | 이규원 |
이름 | |
별호 |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琹山)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58년 8월 15일(1858-08-15) |
출생지 |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
사망일 | 1929년 2월 27일(1929-02-27)(70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
국적 | 한국 |
학력 | 없음 |
경력 | 주미조선공사관 서기관, 주일본공사관 전권공사, 대한제국 외무·법무대신 |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병 조약 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1] 이후 기업인으로 변신해 1919년 대륙고무주식회사를 설립[2]하고 1922년 최초의 국산 고무신인 '대장군 표' 고무신을 생산했다.[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자는 치행(致行), 호는 금산(琹山)이다.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의 할아버지이며, 국문학자 이준영(李準榮)의 형이다.[4] 부산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