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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일제강점기의 군인 (1862–194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이규완(李圭完, 1862년 11월 15일 ~ 1946년 12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무신, 군인이자 일제강점기의 관료, 사상가였다. 그는 박영효의 식객이 되었다가 갑신정변에 행동대장 격으로 참여한 인물로, 박영효의 집사 출신이었다. 그는 서재필 등과 함께 병조 조련국 소속 군사를 이끌고 수구파 대신을 척살하는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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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완 李圭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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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완 (1930년) | |
출생 | 1862년 11월 15일 조선 한성부 뚝섬 |
사망 | 1946년 12월 15일(1946-12-15)(84세)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부 석사동 |
사인 | 병사 (중풍, 등창, 노환 등) |
성별 | 남성 |
국적 | 대한민국 |
별칭 | 초명은 치규(致圭),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 |
학력 | 일본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 졸업 |
직업 | 군인, 무신, 정치인, 농업인 |
종교 | 유교(성리학)→기독교 |
부모 | 이기혁(부), 유씨(柳氏 모), 기계유씨(杞溪兪氏 계모) |
배우자 | 본부인 이름 미상(이혼), 중촌매자(일본인) |
자녀 | 아들 이각일, 아들 이선길, 아들 이영일, 아들 이재길, 아들 이대길, 딸 이송자, 딸 이춘자, 딸 이부자, 딸 이절자 |
친척 | 형 이윤필, 사촌 형 이종필, 매부 강성형, 장인 나카무라 이치, 장모 마가렛 고츠, 사돈 김갑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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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주완(走完),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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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조선 경기도 |
사망지 |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부 석사동 |
복무 | 조선 병조 대한제국 육군 |
복무기간 | 1882년 ~ 1884년 12월 7일 1905년 11월 23일 ~ 1907년 11월 |
근무 | 병조 조련국, 대한제국 육군 |
최종계급 | 조선 육군 하사관 대한제국 육군 소장 |
지휘 | 병조 조련국 |
주요 참전 | 갑신정변 |
기타 이력 | 강원도관찰사, 춘천농립고등학교장, 강원도장관, 함경남도장관, 함경남도지사, 동양척식회사고문, 강원도지사고문 |
세종대왕의 왕자 임영대군의 15대손이었으나 가계는 몰락하여 그는 무학으로 불우한 나날을 보내던 중 박영효에게 발탁되어 그의 청지기가 되었으며, 1883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천거로 일본에 유학, 도야마 하사관학교(戶山陸軍下士官學敎)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귀국했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에 조련국 소속 군사들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에 망명, 이후 망명과 귀국을 반복하다 1907년 3월 귀국하고, 7월 고종 퇴위 후 사면되었다. 이후 통위영 정령관(統衛營正領官), 경무청 경무관(警務廳警務官), 경무부사(警務副使)를 역임했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을 살해하도록 사주받은 박영효 암살 미수범 이일직 무리를 사전에 잡아 일본 경찰에 넘겼다.[1] 1895년 7월 8일 명성황후 암살 미수에 연루되어 망명한 뒤, 귀국과 망명을 되풀이했다. 1898년 귀국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동시에 고종 폐위를 기도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1907년(융희 1년) 7월 귀국하여 중추원 부찬의, 수강원도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 등을 역임하고,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체결 이후에도 강원도도장관에 임명되었다.
1910년 10월 강원도도장관에 유임된 뒤 1918년 함경남도 도장관을 지냈으며, 1924년 사직서를 제출한 뒤 중추원 참의직과 고위직 제안을 물리치고 시골로 내려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농장을 경영하였다. 농장, 농업, 황무지 개간 외에는 기업 활동에 참여하거나, 주주로 간접 참여했다. 그는 조선인들도 일본의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참정권 획득론과 자치론을 주장하였다. 1924년 동양척식회사의 고문을 지냈고, 1927년 신간회와 물산장려회에도 참여하였다. 해방후 강원도지사 고문을 지냈다. 춘천농공고등학교의 초대 교장이기도 하다. 춘천농공고는 1910년 4월 29일 당시 강원도 관찰사인 이규완이 초대 교장을 겸임하고, 사립 측량학교를 가교사를 빌려 1년제의 춘천공립실업학교를 개교한 뒤 그 해 9월 춘천공립농업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2]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초명은 치규(致圭), 다른 이름은 규관(圭寬) 또는 규완(奎完), 주완(走完)으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명을 사용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아사다 료(淺田良) 혹은 아사다 료이치(淺田良一)다. 갑신정변 실패 이후 망명길에 일본 선원 쓰지 도쥬로(辻藤十郞, 쓰지 가쓰자부로의 아들)가 지어줬다 한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