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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사회학자이며 사회학과 인류학이 형성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다비드 에밀 뒤르켐(David-Émile Durkheim, 1858년 4월 15일 ~ 1917년 11월 15일)은 프랑스 사회학자이다. 사회학(Sociology)이라는 이름은 오귀스트 콩트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 '사회학'이 도대체 뭘 어떻게 연구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제대로 제시한 것은 에밀 뒤르켐이 사실상 최초이며, 통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현대사회학의 실증론적 기조를 창시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사회학의 종주(宗主)라는 평가가 존재한다.
1858년 4월 15일 독일과 접경한 프랑스 로렌 지방의 작은 도시 에피날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교 랍비, 어머니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의 딸이었다. 8대조 이래 대대로 유대교 랍비를 지낸 유서 깊은 랍비 집안이었다. 어린 시절, 정규 학교 교육 외에 히브리어, 구약, 탈무드 등을 공부했으며, 철저히 유대교 규율을 지키는 금욕적 태도를 물려받았다.[1]
1867년 뒤르켐은 에피날 중학교에 입학했는데, 두 차례 월반할 정도로 탁월한 학생이었다. 아버지는 랍비가 되기를 바랐으나, 뒤르켐은 파리에 위치한 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파리 명문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르켐은 두 번 고배를 마신 끝에, 간신히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2]
고등사범학교 입학 이후, 뒤르켐은 점차 사회문제에 관심을 품기 시작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 제3공화정 수립, 산업화 이후의 계급 갈등 등으로 혼란에 빠진 프랑스 사회를 재조직하는 데 이바지하려는 학교 분위기 덕분이었다. 뒤르켐은 국가의 재건, 세속적 해방, 사회적, 경제적 조직이라는 세 가지 문제에 사로잡힌, 그리고 사회의 실증적 이해를 진척시키기 위해 노력한 젊은 지식인 중 한 사람이었다.[3] 이 무렵, 그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적 태도에 영향을 받아 점차 유대교와 결별하고 세속주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라는 공리를 제시함으로써 인간적 삶의 사회적 차원을 강조하고, 자유와 정의의 조화라는 제3공화정의 공식적 형이상학(사회철학)을 제시한 철학자 샤를 르누비에(1815~1903), 『고대 도시: 그리스・로마의 신앙, 법, 제도에 관한 연구』(1864)로 유명한
역사학자로 역사학이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해야 한다고 역설한 퓌스텔 드 쿨랑주(1830~1889), 모든 과학이 자신의 고유한 원리에 따라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철학자 에밀 부트루(1845~1921)가 스승으로서 그의 지적 성장을 이끌었다.[4]
1882년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르켐은 1885년까지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한 후, 유급 휴가를 얻어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 베를린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등에서 공부했다. 1887년 보르도 대학의 사회과학 및 교육학 전임강사에 임용되었고, 그해 10월 유대인 여성 루이즈 줄라 드레퓌스와 결혼해 딸 마리 벨라와 다들 앙드레아르망을 두었다. 아들은 나중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5] 고등학교에서 철학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는 철학에서 사회학으로 이행하는 시기를 거친다.
1892년 소르본 대학에서 『사회분업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듬해 이를 출간해 사회학자로서 첫발을 뗀다. 이 책에서 뒤르켐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고, 기계적 연대와 유기적 연대라는 그의 사회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을 제시한다. 그의 사상은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알렉시 드 토크빌 등 르네 데카르트에서 뻗어 나온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이마누엘 칸트, 빌헬름 분트, 카를 마르크스 등 독일의 지적 전통을 결합한 결과였다.[6]
1894년 뒤르켐은 보르도 대학 부교수로 승진했고, 1896년 사회과학 담당 정교수로 임명되어 1902년까지 재직했다. 이 자리는 프랑스 대학 최초의 사회학 교수직으로 간주된다. 1902년 소르본 대학 교육과학 강좌 담당 전임강사로 임명되고 1906년 부교수, 1913년 정교수가 되어 1917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재직했다. 그가 정교수가 된 후 교육과학 강좌는 그의 소망에 따라 교육학과 사회학으로 변경되었다. 이는 프랑스 대학에서 사회학이라는 명칭이 붙은 최초의 강좌였다.[7]
주요 저작으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1895), 『자살론』(1897),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들』(1912) 등이 있다.
원래 뒤르켐은 종교적/인종적 단일성이 깨진 근대 사회가 어떻게 통합과 응집성을 유지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근대 사회의 사회 생활을 연구하기 위해 뒤르켐은 사회 현상에 거의 처음으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사회학을 사회적 사실이라고 하는 객관적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한다. 객관적이라고 하는 것은 관찰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개인의 주관을 초월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한다. 언어, 집합의식, 집단표상, 종교, 사회연대와 같은 것을 전형적인 사회적 사실로 보고 사회적 사실은 개인에 외재하면서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규제하는 강제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허버트 스펜서와 마찬가지로 뒤르켐은 사회의 여러 분야들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기능하는지 밝혀서 그 성격과 존재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를 기능주의 사회학의 선구자로 보기도 한다. 뒤르켐은 사회는 각 부분의 합 이상의 존재라고 주장했다. 사회적 사실은 각 개인의 행동에 종속되지 않는, 사회 그 자체로 존재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회 구성원은 분명 자아와 개인 의식 및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외부적인 압박으로 인해 의식과 자유에 제한이나 구속을 받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 외부적 압박을 사회적 사실로 규정한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사회는 유사성에 토대한 사회적 연대가 이룩되었으나 노동분화가 고도화되고 사회구조가 복잡해짐에 따라서 이와 같은 기계적 연대가 상실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산업사회에 사회적 연대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차이에 근거한 기능적 상호의존성으로 인하여 새롭고 고차적인 사회연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분업의 기능은 사회적 연대 또는 사회통합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자살론》에서 뒤르켐은 프랑스 법무부의 기록 문서를 이용해서 자살 관련 자료 2만 6000건을 분석한다. 이는 역사상 거의 최초로 통계적 방법에 바탕을 두고, 합리주의적, 실증주의적 방법론으로 자살의 사회적 유형과 원인을 추출한 연구이다. 자살에 관해 이처럼 방대한 자료를 체계적이고 치밀하며 심층적으로 다룬 연구는 오늘날에도 무척 드물다.[8]
이 책에서 뒤르켐은 자살을 개인적, 심리적 현상으로 규정하지 않고 무엇보다 사회적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개인은 자신을 넘어서는 도덕적 현실에 의해 지배된다. 그것은 집단적 현실이다. (중략) 결혼, 이혼, 가족, 종교, 군대 등은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자살에 영향을 끼치며, 그런 법칙 중 일부는 심지어 수치로 표현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살은 개인적 동기와 사회적 원인이 상호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회적 환경이 자살의 진정한 원인이고, 자살은 사회적 원인의 개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9]
뒤르켐에 따르면, 자살의 사회적 원인은 사회적 연대이다. 사회적 연대는 개인이 자신을 사회에 결속하고 사회에 유대감을 품는 것을 가리키는 사회적 통합과 사회가 개인의 존재, 사고, 행위 등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사회적 규제로 나누어진다. 개인이 적절한 수준에서 사회에 결속되어 있지 않거나(사회적 통합), 사회가 적절한 수준에서 개인을 규제하지 않을 때(사회적 규제) 자살이 일어난다. 개인과 사회의 적절치 못한 관계가 자살의 사회적 원인이다.[10]
자살은 사회적 통합 정도에 따라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로 나뉜다. 개인이 사회에 너무 약하게 통합되면 이기적 자살이 일어나고, 너무 강하게 통합되면 이타적 자살이 일어난다. 또한 자살은 사회적 규제 정도에 따라 아노미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로 나뉜다. 사회가 개인을 너무 약하게 규제하면 아노미적 자살이 나타나고, 너무 강하게 규제하면 숙명적 자살이 나타난다.[11]
전통 사회에서는 이타적 자살과 숙명적 자살이 주로 나타나는 반면, 현대사회에서는 사회적 연대의 부재로 인한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주로 나타난다.[12] 사회적 연대가 약하기에 현대인들은 흔히 목표 상실로 괴로워하거나 충족될 수 없는 욕망에 괴로워한다. 자칫하면 과도한 개인화로 인해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기적 자살의 경우에는 사고가 완전히 자아의 내면을 향하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목표를 갖지 못한다. 아노미적 자살의 경우에는 욕망이 더 이상 한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목표를 갖지 못한다. 전자는 꿈의 세계의 무한함 속에서, 그리고 후자는 열망의 무한함 속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기적 자살이 사회에 개인이 통합되지 못하고 완전히 자아의 내면 세계로 도피한 나머지 우울해지거나 꿈의 세계에 사로잡히거나 울적한 번민에 빠짐으로써 일어난다면,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무한한 열망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맨 나머지 삶의 확고한 축과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고 피로, 환멸, 좌절을 느끼게 됨으로써 일어난다.[13] 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이 한계에 부닥치면 자신의 내면세계로 도피하고, 거기서도 욕망을 달랠 수 없으면 다시 외부로 달아나서 더욱 심화한 불안, 초조 등에 시달리는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다. 둘은 서로 뒤엉켜 더 나쁜 쪽으로 서로를 끌어들인다.
『도덕 교육』은 1902~1903년 뒤르켐이 소르본 대학에서 강의한 '도덕과 교육'의 내용을 사후에 정리해 출간한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도덕 교육이란 초등학교에서 교사들이 아동들에게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즉 전적으로 이성의 권위에 근거하는 도덕성을 교육하는 일련의 제도적 행위이자 과정을 말한다. 도덕성은 규율의 정신, 사회 집단에 대한 결속, 의지의 자율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고, 도덕 교육의 목표는 세속화한 시대가 가져온 아노미와 이기주의의 만연으로 인한 집합적 규율과 이상의 부재에 맞서서 이 세 가지 도덕성을 함양하는 일이다.[14]
뒤르켐은 개인이 도덕을 내면화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입문하는 것을 '도덕의 사회화'라고 불렀다. 뒤르켐에 따르면, 도덕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규칙을 지키도록 세뇌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생활을 할 수 있는 근본적 성향(도덕성)을 함양하는 것이다. 뒤르켐은 도덕성이 3단계에 거쳐 형성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가 실천에 직결되는 이론을 연구하여 당시에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고 한 것과 대조적으로 뒤르켐은 사회에 관한 과학적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종교 생활의 원초적 형태》는 사회 통합의 접착제였던 종교의 권위가 허물어진 혼란의 시기에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메커니즘이 무엇인가 탐구할 목적으로 종교의 기원을 인류학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자연계에 그 어떠한 사물도 본래 신성하거나 세속적인 것은 없다. 초자연적 표상 체계를 예찬하는 종교 의식을 통해서 집합 의식을 내면화하여 사회 통합이 강화된다. 카리스마 지도자가 사회를 인도하고 통치하는 데 사용하였다. 요컨대 종교의 본질은 사회적 산물이며 개인은 종교적 실천을 통하여 집합 의식을 내면화하여 소속 집단 혹은 사회에 통합되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에서 수행하는 기능적 역할에 대하여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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