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숭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엄숭(嚴嵩, 1480.3.3.~1567.5.29)은 자(字)는 유중(惟中), 호(號)는 개계(介溪), 혹은 면암(勉庵)이다. 강서성(江西省) 분의현(分宜縣) 출신이다. 조적(祖籍)은 복건성(福建省) 소무현(邵武縣)이다.[1] 명 가정(嘉靖) 연간 권신으로, 내각수보(內閣首輔), 이부상서(吏部尙書), 근신전(謹身殿) 대학사(大學士)에 이르렀다.
명 효종(孝宗) 홍치(弘治) 18년(1505) 진사가 되었고,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로 개수되었고, 한림원 편수(編修)가 되었으나, 곧바로 병가를 내고 귀향했다. 엄숭은 8년동안 공부하면서 시문이 준엄하고 깨끗하며 성명은 비로소 알려졌다.
가정(嘉靖)7년(1528) 황제의 명에 따라 현릉(顯陵)에 제를 올렸고 돌아가서는 상서를 고하자 가정제는 기뻐했다. 몇년 후 전후로 이부우시랑(吏部右侍郞)에 올랐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로 승진하였으며, 2년 뒤 이부상서(吏部尙書)로 바뀌었다. 가정15년(1536) 만수절(萬壽節) 하례를 위해 북경에 왔다. 이때 조정에서는 『송사(宋史)』 중수를 논의하였고, 엄숭은 북경에 남아 예부상서 겸 한림원학사로서 업무를 관장하였다. 황제의 마음을 잘 간파하고 초사(醮祀)의 청사(靑詞)로서 총애를 얻어, 태자태보(太子太保)에 가해졌다. 가정 21년(1542)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大學士)에 임명되었다. 문연각(文淵閣)에 입직하였고, 이전처럼 예부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예부 업무 담당에서 해촉되었고 서원(西苑) 임무만응 담당하였다. 이어 이부상서(吏部尙書), 근신전대학사(謹身殿大學士), 소부겸태자태사(少傅兼太子太師), 소사(少師), 화개전대학사(華蓋殿大學士)로 승진하였다.
엄숭은 황제에게 아첨하고 권력을 장악하였으며 20년 가까이 국정을 독단하였다. 사대부들은 입을 닫았으며 뇌물이 횡행하였다. 엄숭은 타인을 해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였으며,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배척하였다. 군향을 빼돌리고 국경 수비를 해이케 했으며, 뇌물을 수뢰하고 탐오를 저질렀으며, 당시 사회 갈등이 격화되었다. 만년에는 가정제의 분노를 샀고, 가산을 몰수당하고 혁직되었으며, 2년 뒤에 사망하였다. 저서에 『검산당집(鈐山堂集)』 4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