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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신학(言約神學, 영어: covenant theology, covenantalism) 또는 계약신학(契約神學, 영어: federal theology, federalism)은 성경을 해석하는 하나의 신학체계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에 중점을 둔다. 주로 기독교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언약(covenant)은 성경에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양측 사이의 조약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각측이 지켜야할 의무 조항들로 이루어지며 한 쪽이라도 의무를 불이행할 경우 언약은 파기된다. 특이한 것은, 일반적으로 조약이라 함은 양방의 합의하에 체결되는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경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관계라는 성격 때문에 인간의 동의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선언과 함께 바로 체결된다. 언약 신학자들은 성경에 크게 세 가지의 언약이 등장한다고 본다 (두 가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 경우 아래 '구속의 언약'과 '은혜의 언약'을 하나로 보는 시각이다):
구속의 언약은 창세전에 체결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완수되었다.
아담은 이 언약을 파기했으며 이로써 인류에게는 죽음과 심판이 왔다.
사실 위의 '구속의 언약'이 체결될 때 이미 '누가 하나님의 백성이냐'하는 것은 정해졌다.[1] 이것은 예정론과도 모순 없이 일관 된다. 은혜의 언약과 행위의 언약의 차이는 그 내용 뿐만 아니라 예정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 은혜의 언약이 파기될 가능성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2]
이상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적 견해의 전형이다. 그러나 성경적 언약관은 재고찰되어야 한다.
1. 언약의 근원
언약은 성경에서만 특별히 쓰이는 말이 아니다. 일반 사회적으로 쓰이는 계약과 같은 말이다. 모든 인격적 관계에는 계약이 존재한다. 윗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정 시행하신다는 면에서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구별된 말을 쓸 뿐이다. 언약의 근원은 인간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인하여 존재하게 된다.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지상 피조물의 대표로 지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인간은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계약적이다. 늘 선택과 결과가 함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은 피조된 후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들어간다(호세아 6:7).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모든 신자나 성경의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나 신약시대 그리스도의 교회도 마찬가지로 언약 백성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계약적이라는 것이다.
2. 언약의 동질성
흔한 오해는 인간 본질과 창조의 목적으로 인해 존재론적으로 언약적이라는 것은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언약은 아담으로부터 요한계시록의 천년왕국을 끝으로 천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격적 관계의 기저이다. 성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두 언약을 말한다. 두 계약의 기본은 같다. 계약 당사자, 계약서 작성자가 같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다. 계약 성립과 시행은 계약 백성을 택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역사이다. 단지 그 관계의 중요성과 계약의 특성상 구약은 짐승의 피로 신약은 그 아들의 피로 그 언약 성립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의 근본이시다. 물론 그 백성의 생명의 근본이시다. 그러므로 창조주를 떠나는 것이 사망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생명의 피로 맺는 것이다. 신구약 공히 생명의 하나님께의 배약은 죽음만을 가져온다.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는 의가 없이는 불가하다. 그러므로 구약은 메시아,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죄사함을 받아야 그 백성이 될 수 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느니라!"(사도행전 4:12)라고 외친 베드로의 설교는 진리이다. 구세주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런 면에서 행위 언약 은혜 언약 운운하는 것은 깊지 못한 언사이다. 처음 아담은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으로 생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오실 메시아를, 신약은 오신 메시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거기에 언약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옛 이스라엘은 첫 언약 즉 옛 언약 백성이다. 언약 차원이 같기 때문이다. 둘 다 육체적 차원의 계약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나 타락후 메시야의 옛 백성에게나 신약 백성에게나 그 창조 및 구속의 목적이 동일하다(엡 2:10, 딛 2:14, 마 5:13-16). 그 언약의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요 축복과 생명이 따르는 것이다. 에베소서 1:4~5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선택은 거룩한 백성, 흠없는 백성을 얻는 것이 그 옛 창조와 새 창조의 동일한 목적이다. 그 결과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다.
3. 신구약의 차이
신구약의 차이는 흔히 알고 있는 예레미야 31:31-33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유명한 성구처럼 오해되는 성구도 없다. 계약이란 항상 의무조건과 권리약속조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경 계시의 특성상 시대 상황마다 필요한 부분이 강조되고 나머지 부분은 기정 사실로 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의 이 새 언약에 대한 예언도 마찬가지이다. 최소한 에스겔 36:26~28절 정도는 같이 읽어야 오해를 덜 수 있다. 계약서상의 의무 조항의 범주 차원이 겉 사람 차원에서 속 사람 차원까지, 즉 마음에까지 심화확대된 것이다. 새 계약의 의무 조건인 계명들은 산상수훈과 신약성경에서 보듯이 구약과는 차원이 달라졌다. 하나님 백성의 의무조항이 육체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하나님은 여전히 육체를 입고 있는 언약 백성을 위해 구약과는 달리 성령을 주셔서 그 계약 즉 그 법을 실행할 수 있도록 새 언약을 보증해 주시는 것이 또 다른 신약의 특성이다. 새 언약은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지킬 수 있기에 신약은 구약과 달리 그 백성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기도의 명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겔 36:26-28)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존 칼빈은 언약을 정부의 문서에 쓰는 인(Seal)오로 비교하여 보았다. 울리히 츠빙글리는 언약을 "군사적 맹세'와 비교하여 보았다. 우르시누스와 베자는 정부의 문서처럼로 이해하였다. 뉴잉글랜드로 온 청교도들은 언약에 대하여 성례처럼 생각하였다. 또한 그들은 문서의 인보다는 문서 자체의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청교도에게 있어 언약신학은 그들의 신학에 있어 핵심적이다. 이 신학에 대해서 집필한 자는 패트릭 길레스피(1617-1675)로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대해서 심도있게 다루었다.[3]
청교도 특히 뉴잉글랜드의 언약신학의 어원을 찾는 작업은 페리 밀러의 17세기 뉴잉글랜드의 지성에서 비롯하였는 데, 비어마는 언약의 정치,사회적 적용에 대한 해석이 루터와 칼빈에게서 온 것이 아닌 쯔빙글리와 불링거의 스위스 개혁파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4]
언약신학을 체계화하는 것은 복잡하지만 언약적인 사고가 괴로와하는 영혼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만드는 도구가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5]
세대주의신학은 구약과 신약의 언약이 불연속적인 관계로 두 언약의 차이를 강조한다. 또한 새언약 신학은 옛언약과 새언약의 구별을 통하여 새언약이 옛언약을 대체함으로 옛언약(십계명)이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통적 언약신학은 구약과 신약과의 연속성과 일치를 강조하고, 특히 행위언약의 도덕법적인 기능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7장 2절과 3절에서의 행위언약은 신자가 성화를 하는 데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됨을 말하고 있다.
밀러는 청교도에 대한 역사적 연구 중에서 세속적인 관점에서 논의를 펼쳤는 데, 그는 언약신학이 칼빈주의에서 청교도로 가는 과정에서 언약신학이 중심으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도나 도구로써 사용되어, 청교도들의 국가관과 구원관에 핵심으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입장에 대하여 조지 마즈든은 밀러의 증거가 성경으로 뒷받침을 하기 보다는 그의 독창적인 관점이라고 비평하였다.
카를 바르트는 요하네스 코케이유스에 의해서 발전된 언약사상에 대해서 평가 하였다. 그에 따르면, 요하네스 코케이유스에 의해 발전된 언약의 이중구조(행위언약 & 은혜언약)는 츠빙글리와 불링거에 의해서 강조되었던 언약의 유일성과 영원성을 훼손한다고 보았다. 그는 코케이유스의 언약구조(행위언약의 단계적 폐기를 통해서 은혜언약이 완성됨)를 칼뱅의 언약 개념으로부터 구별하였다.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 또한 언약의 이중 구조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의미상 코케이유스와는 다르며, 오히려 코케이유스적 언약사상 발전을 불운한 것으로 평하고 있으며, 존 헤셀링크는 행위언약의 폐기에 의해서 주도 되는 은혜언약의 완성은, 신학적으로 사회에게 우리-그들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부여할 뿐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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