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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네덜란드어: Abraham Kuyper, 1837년 ~ 1920년)는 네덜란드의 수상이자 신학자이다. 신 칼뱅주의가 그에 의해 시작된 운동이다.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를 설립하고 기독교 정당인 반 혁명당을 설립하였다. 에른스트 트뢸치는 그의 저서 ' 기독인 교회의 사회적 고찰'에서 현대 칼빈주의 사상에 주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네덜란드 마슬라위스에서 얀 프레데릭 카위퍼르(Jan Frederik Kuyper)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58년에 수필경연대회에 참가하였는 데, 수필의 제목은 '존 칼빈과 존 알라스코의 비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존 칼빈에 대하여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지만, 존 알라스코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어서 영국의 박물관에 요청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그런데, 하아렘에 위치한 개혁교회 목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만나게 되어 그는 작품을 마치게 되어 결국 상을 받았다. 그 후에 영적침체의 시기가 그를 엄습하였는 데, 그 다음해에 샬롯 영이 지은 < 레드클리프의 상속인>이라는 소설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그 책을 읽고 깊은 회심을 경험했다고 적었다.[1]
카위퍼르는 네덜란드 농업공동체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하면서 목축업자인 교우들의 순수한 신앙에 감동을 받았다.[2] 예배가 끝나고 교우들이 모여서 "카위퍼르 목사님이 새로남을 경험하도록"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룬 반 프린스테레르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개혁교회 신학자로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를 설립하고 네덜란드의 수상이 되었다. 그가 이끈 반혁명당은 기독교 정당이었고, 카이퍼는 정치 현장에서 많이 투쟁했다. 카이퍼는 교회의 목회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고, 급기야 그가 성립했던 자유 대학의 교수직도 포기하였다. 카이퍼는 프랑스 혁명을 강하게 부인한 흐룬 판 프린스테러르를 이어 받아 작은 정부와 공화주의를 따르는 자가 되었다.[3]
1898년 카위퍼르는 미국에 방문하는 기간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연설을 했는 데, 그것이 그 유명한 칼빈주의 강연이다. 리처드 마우교수는 1960년대 말에 이 강연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공적 삶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새로운 기독교적 전망을 갖게 되었다고 그의 저서에 기록하였다.[4][5]
카위퍼르는 네덜란드의 헤르만 바빙크·미국의 벤저민 워필드와 더불어 세계 3대 칼빈주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주장한 일반은총과 하나님의 영역 주권사상은 개혁신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 카이퍼 연구소가 있으며 한국에서는 정성구 박사가 설립한 한국칼빈주의 연구원에 카이퍼 관련 자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의 전환을 강조하였다. 기독교가 개인 신앙의 차원에서 삶 전체, 우주 전체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돼야 함을 주장하였다.
존 오언의 성령론에 이어 개혁주의 성령론에 대한 책에서 그는 오순절적인 성령 강림은 다시는 없다고 주장하였다.[6]
평가
아브라함 카이퍼의 신학을 넘는 것이 한편의 신 칼뱅주의 발전을 의미한다. 그의 관점들이 성경적인 주장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그리고 오늘날 이 시대의 상황속에서 그의 영역주권 사상이 더욱더 세밀하게 논리적으로 발전해야 할 것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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