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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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神秀: 606?~706년)는 당나라(618~907)의 선승이다. 당나라에서 측천무후를 비롯한 3명의 황제들로부터 국사로 추앙받았다.[1]
북종선(北宗禪)의 시조이다.[2] 선종(禪宗)의 제5조인 홍인(弘忍: 601~674)의 제자이며, 사후 대통선사(大通禪師)라고 시호(諡號)되었다.[2]
중국 선종은 5대조사인 홍인으로부터 북종선과 남종선으로 갈라진다. 북종선은 신수를 6대조사로, 남종선은 혜능을 6대조사로 각각 섬겼다. 후에 남종선이 압도하면서, 북종선은 사라져버렸다.[3]
신수가 살아있을 때는 혜능을 신수와 비교한다는 것 자체게 신수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신수와 혜능의 나이차이가 30년 이상이므로, 신수는 혜능의 이름도 몰랐을 거라는 주장도 있다.[4]
혜능의 제자들의 노력으로 북종선은 점점 자리를 잃게 된다. 732년에 하택신회가 활대 대운사에서 북종선 승려를 논쟁에서 압도하였고, 이로써 혜능은 사후 30년이 지나 공식적인 6대조사로 인정된다.[5]
이후 북종선은 뛰어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해, 이어지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6]
카이펑(開封)에서 태어났다.[2] 어려서 유교와 노장에 관한 전적과 나아가 삼승(三乘)의 경론과 사분율(四分律) 등에 널리 정통하였다.[2] 625년에 뤄양의 천궁사(天宮寺)에 출가하였다.[2]
46세[7] 때에 기주 쌍봉산의 동산사에 들어가 선종의 제5조 홍인(弘忍: 601~674)에 사사하였다.[2] 700여 명의 문하생 중에서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은 없었고 제일좌로서 신수상좌(神秀上座)라고 불리었다.[2] 동문인 혜능(慧能: 638~713)과는 서로 친했고 피차 계발하는 바가 있었다.[2]
신수는 후에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로 옮겨갔는데 그의 높은 덕을 따라서 많은 도인들이 모여들었다.[2] 측천무후가 이 소식을 듣고 내도량(內道場)에 그를 모시고 법요(法要)를 강의하게 하였다.[2]
측천무후 · 중종(中宗) · 예종(睿宗)의 국사(國師)로 있었고 장안과 뤄양의 법주로 추대되어 6년간 그 직을 맡았다.[2] 칙명에 의하여 당양산(當陽山)에 도문사(度門寺)를 건립하고 주지가 되었다.[2]
백여 살의 장수를 누리면서 뤄양 천궁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장안과 뤄양을 중심으로 하는 화베이(華北) · 허난(河南) 지방에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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