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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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넘 전투(영어: Battle of Blenheim) 또는 제2차 회흐슈테트 전투(독일어: Zweite Schlacht bei Höchstädt)-는 1704년 8월 13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주요 전투이다.[1]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포위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떨어져 나가게 하고 유리한 평화협정을 맺으려 하였다. 프랑스의 마르생 원수와 바이에른의 바이에른 선제후의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서쪽에서 위협을 가했고, 이탈리아 북부에 배치된 방돔(Vendôme) 원수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브레너 가도(Brenner Pass)를 통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동쪽에서는 라코치 페렌츠 2세(Rákóczi)의 헝가리 반란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빈은 세 방향에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이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인 영국의 말버러 공작(Duke of Marlborough)은 영국-네덜란드의 동맹군을 베드부르크(Bedburg)에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대동맹과 함께 황제 레오폴트 1세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블레넘 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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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일부 | |||||||
블린트하임에서 급전을 보내는 말버러 공작. 로버트 알렉산더 힐링포드의 유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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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영국 |
프랑스 왕국 바이에른 선제후국 | ||||||
지휘관 | |||||||
외젠 드 사부아 공자 |
탈라르 공작 페르디낭 드 마르생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 | ||||||
병력 | |||||||
52,000명,[4] 대포 66문 |
56,000명 대포 90문 | ||||||
피해 규모 | |||||||
4,542명 전사, 7,942명 부상 |
20,000명 전사 및 익사 혹은 부상, 14,190명 포로 |
말버러 공작은 모략과 정치적 조율을 적절히 사용하여 동맹국과 적군 모두에게 자신의 진정한 목표를 숨길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저지대 국가에서 도나우 강까지 5주간 250마일(400km)를 진군하는 동안 네덜란드 방면의 프랑스군에게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도나우강에 위치한 도나우뵈르트(Donauwörth)를 확보한 후에, 말버러 공작은 네덜란드 방면의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탈라르(Tallard) 원수가 슈바르츠발트(검은 숲)(Schwarzwald)을 넘어 구원군을 이끌고 도착하기 전에 독일 방면의 프랑스군을 지휘하는 마르생 원수와 바이에른 선제후의 연합군과 교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사령관들은 그들의 병력이 충분해질 때까지 싸우는 것을 꺼려했고, 말버러 공작은 바이에른군을 끌어내기 위해 바이에른에 대하여 약탈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약탈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군은 탈라르 원수가 도착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탈라르가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외젠 공작(Prince Eugene) 역시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고, 양군은 결국 블린트하임(Blindheim - 영어식으로 블레넘(Blenhelm))의 작은 마을 근처에 있는 도나우 강의 강둑에서 만나 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블린트하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가 되었다. 영국-오스트리아 동맹군이 압도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빈은 프랑스-바이에른 연합군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대동맹이 붕괴되는 것을 막아냈다. 바이에른은 전쟁에서 이탈 했으며, 루이 14세는 이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빠른 승리를 원하게 되었다.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탈라르 원수가 영국군에 포로로 잡힌 것을 비롯해 30,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1704년이 가기 전에 동맹군은 다음 해인 1705년에 프랑스 본토로 진군해 들어가기 위한 준비로 트리어(Trier)의 도시들과, 란다우(Landau) 그리고 모젤(Moselle)에 있는 트라바체(Trarbach)를 점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