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티히 작전(독일어: Unternehmen Lüttich)는 오버로드 작전 기간인 1944년 8월 7일부터 8월 13일까지 독일 국방군이 노르망디 모르탱 일대에서 벌인 반격 작전이다. 뤼티히라는 명칭은 벨기에 리에주의 독일식 이름으로, 영국 및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사에서는 해당 전투를 뤼티히 작전을 모르탱 반격(영어: Mortain counter-attack)이라고 부른다. 뤼티히 작전은 브르타뉴로 진격하는 미국 제3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코브라 작전 당시 미국 제1군이 점령했던 코탕탱반도의 핵심지역인 아브랑슈 일대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작전에 참여했던 독일군의 핵심 부대는 제47기갑군단으로 독일 국방군 2개 사단과 무장친위대의 기갑 사단 1개 반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군은 모르탱 지역을 방어하고 있던 미국 제7군단을 상대로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공세는 곧 멈추었고 연합군은 독일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작전에 참여했던 독일군 전차 대부분을 파괴하였다.[1] 모르탱을 둘러싸고 전투가 6일 동안 이어졌지만 미군은 독일군이 빼앗은 영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독일군 사령부가 히틀러에게 작전이 헛된 것이라고 경고했기 때문에 뤼티히 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또한 노르망디에서 가용할 수 있는 기갑부대를 모두 뤼티히 작전에 투입한 것은 곧 독일군에게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노르망디 서쪽과 남쪽에 위치한 독일군 부대가 격멸됨에 따라 다수의 독일군 부대는 팔레즈 포위망에 갇히게 되었다.
배경
1944년 7월 25일, 오마 브래들리 중장이 지휘하는 미군은 암호명 코브라 작전으로 생로 근처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다.[2] 노르망디에 있던 거의 서쪽 절반의 독일 전선이 붕괴했고, 8월 1일 미군은 아브랑슈를 점령했다.[2] 코탕탱반도의 입구에 있는 이 마을과 근처에 퐁토보에 있는 다리가 손상 없이 점령되면서, 미군은 "코너를 돌았다". 이를 통해 독일군의 전선은 더 이상 서쪽 끝의 대서양에 머무르지 않았고, 미군은 서쪽과 남쪽으로 가 브르타뉴로 진격할 수 있었다.[2][3] 조지 S. 패튼이 지휘하는 미국 제3군이 8월 1일 편성되었다.[4] 퐁토보에 있는 다리에 독일군이 공습했음에도 불구하고 패튼은 3일 동안 7개 사단을 진격시켰고, 패의 군대는 브르타뉴에 있는 항구를 향해 진격하는 동안 독일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5]
7월 30일부터, 마일스 뎀프시 중장이 지휘하는 영국 제2군은 미군의 동쪽 측면에 지원 공격인 암호명 블루코트 작전을 개시했다. 미군의 돌파구를 막기 위해 독일군의 기갑 예비군 대부분이 영국군의 블루코트 작전에 대하기 위해 서쪽으로 돌진했다.[2] 한편, 미국은 아브랑슈 주변의 회랑을 넓히기 위한 공격을 계속했다. 비록 독일군이 중요한 도로 분기점인 뷔레를 점령했지만, J. 로턴 콜린스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7군단은 8월 3일 아브랑슈에서 동쪽으로 31km 떨어진 모르탱을 점령했다.
다음날, 트로이 H. 미들턴 소장의 미8군단이 브레스트와 로리앙 항구를 향해 브르타뉴에서 계속 서쪽으로 진격했지만, 브래들리는 패튼에게 미3군의 주력과 함께 동쪽으로 독일군의 측면이 개방된 곳을 돌아 독일 후방 지역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6] 웨이드 헤이슬립스 소장의 미국 15군단은 3일 동안 무려 121km를 진격했고, 8월 7일에는 독일 제7군 사령부가 있던 르망에 접근하고 있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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