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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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전 사건(南民戰事件)은 1979년 대한민국 유신 말기 최대 공안 사건이자 논란은 있지만 일부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된 사건이다. 1978년부터 1979년 4월 동아건설 회장 최원석의 자택 등 서울 강남 일대에서 벌어진 강도·절도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확대됐다.
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등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2006년 3월, 노무현 정권에서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 관련자 중 29명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했다. 남민전 주도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1981년 옥사한 이재문과 1982년 사형당한 신향식은 제외되었다.
홍세화는 이 사건이 알려지기 전 모 기업의 프랑스 파견 직원으로 프랑스에 갔다가 이 사건이 알려진 뒤 프랑스로 정식으로 망명하였다. 홍세화 처지에서 바라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후일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