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조선의 의병장 (1568-1596)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김덕령(金德齡, 1568년 12월 29일~1596년 8월 21일)은 임진왜란 시기의 의병장이자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별칭은 신장(神將), 초승장(超乘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충용장(忠勇將) 등이며,[1][2][3][4][5] 일본군은 석저장군(石底將軍)이라 부르기도 했다.[1][6] 본관이 광산이기는 하나, 동시에 용안 김씨의 시조로 받들어진다.[7]
김덕령 金德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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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선전관청 예하 선전관 | |
임기 | 1594년 2월 1일~1594년 3월 31일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이름 | |
별명 |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별칭은 신장(神將), 충용장(忠勇將), 익호장군(翼虎將軍), 석저장군(石底將軍).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67년 12월 29일 |
출생지 | 조선 전라도 광주군 광주읍 |
거주지 | 조선 전라도 광주 |
사망일 | 1596년 8월 21일 (30세/만28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에서 병사 (모함으로 인한 옥사이자 고문 후유증 병사) |
국적 | 조선 |
학력 | 한학 수학 |
경력 | 군인 겸 의병장 |
정당 | 서인 세력 후예 |
부모 | 김붕섭(부), 남평 반씨 부인(모) |
형제자매 | 형 김덕홍(金德弘) 남동생 김덕보(金德普). |
배우자 | 흥양 이씨 부인 |
자녀 | 아들 김광옥(金光沃) |
친인척 | 외조부 반계종 처남 이인경(李寅卿) 봉사손 김거(金璩) |
종교 | 유교(성리학) |
김덕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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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표기: | 김덕령 |
한자 표기: | 金德齡 |
개정 로마자 표기: | Gim Deokryeong |
매큔-라이샤워 표기: | Kim Tŏkryŏng |
예일 표기: | Kim Teklyeng |
문무겸전의 인물로, 향교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 지방에서 그동안 모은 의병 3천여 명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이에 당시 전주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의 군호를, 권율로부터 초승장의 군호를 받았고, 이듬해 1월 선조로부터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는다. 1594년(선조 27년) 4월에 28세(만26세)에 팔도 의병 총사령관이 되었다.[8][9]
그러나 김덕령이 의병으로 활동하던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이루어지던 시기라서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아 별다른 공은 없으며, 1594년(선조 27년) 수륙합동 작전이 이루어졌던 장문포 해전에도 김덕령이 참전했으나 거의 활약하지 못하였다.
그 뒤 부하 장졸을 너무 가혹하게 다루다 죽게 한 일 등으로 옥고를 치르고 1596년(선조 29년) 2월 말에 풀려났다. 그러다 1596년 7월 이몽학의 반란을 토벌하려 출병하였으나, 난이 끝나 돌아오다가 충청도체찰사 종사관 등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1661년(현종 2년) 김덕령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10][11] 1788년(정조 12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고자 사당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忠壯)의 시호를 내렸다.
해광 송제민은 그와 내외종사촌 사이이다.[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