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바타케 아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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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일본어: 北畠顕家 きたばたけ あきいえ[*] ~ )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말기에서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에 걸쳐 활약했던 남조(南朝)측의 구교(公卿), 무장이다.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를 저술한 준삼후(准三后)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장남이다. 저작으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北畠顕家上奏文)이 남아 전하고 있다. 관직은 남조 종2위(従二位) 곤노주나곤(権中納言) 겸 무쓰노다이스케(陸奥大介) 진주후다이쇼군(鎮守府大将軍)이며, 사후 종1위(従一位) 우다이진(右大臣)으로 추증되었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
무사 정보 | |
출생 | 13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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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338년 6월 10일 |
주군 | 고다이고 천황 |
관위 | 남조(南朝) 종2위(従二位) 곤노주나곤(権中納言) 겸 무쓰노다이스케(陸奥大介) 진주후다이쇼군(鎮守府大将軍), 추증 종1위(従一位) 우다이진(右大臣) |
씨족 | 기타바타케 씨 |
부모 |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
형제자매 | 아키노부(顕信), 아키요시(顕能) 등 |
자녀 | 아키나리(顕成) , 무라카미 모로키요(村上師清[lower-alpha 1] 등이 있다. |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의 측근으로 「노치노 산보」(後の三房)의 한 명이었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아들로써 전례없이 14세(만 12세)의 나이에 산기(参議)로 임명되고 구교의 반열에 올라,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에서는 진주후다이쇼군(鎮守府大将軍)으로써 노리요시 친왕(義良親王, 훗날의 고무라카미 천황)을 받들어 무쓰국(陸奥国)으로 내려갔다(무쓰 쇼군후陸奥将軍府). 훗날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싸움인 겐무의 난(建武の乱)이 일어나고, 서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와서 제1차 교토 합전(京都合戦)에서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등과 협력하여 이를 교토에서 쳐부수고, 규슈(九州)로 내쫓는다. 그리고 부임지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규슈로 쫓겨갔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다시금 일어나 교토를 점령해 새로운 천황을 옹립하고, 고다이고 천황이 남쪽으로 요시노로 가서 새로운 조정을 선포함으로써 남북조 내란(南北朝の内乱)이 일어나기에 이르렀고, 다시금 이를 치고자 서쪽으로 와서 가마쿠라를 함락시키고 교토로 향하였다. 아오노가하라 전투(青野原の戦い)에서 막부측 무장 도키 요리토(土岐頼遠)를 쳐부수지만, 요시사다와의 연계에 실패하고 곧장 나아가는 것이 힘들어졌다. 이세(伊勢)를 경유하여 우회해서 야마토(大和) 등지를 중심으로 북조군을 상대로 과감한 도전을 행하여 마침내 이즈미국(和泉国) 사카이노우라(堺浦) ・ 이와쓰(石津)까지 몰아붙였는데, 이와쓰 전투(石津の戦い)에서 분전 끝에 막부측 집사(執事) 고노 모로나오(高師直)의 군에 패배하고 전사하였다. 향년 21세(만 20세)였다.
고다이고 천황의 어전에서 이목구비가 수려했던 중국 북제(北斉)의 황족 무장 고장공(高長恭)으로 분하여 『료오』(陵王, りょうおう)를 추어 보이는 등 예능 관련 일화도 남아 있다.
사후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에 이르러 아키이에를 주제신(主祭神)으로 하는 레이잔 신사(霊山神社)와 아베노 신사(阿部野神社)가 세워졌으며, 이들은 겐무 중흥 15사(建武中興十五社)의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