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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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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전쟁(스페인어: Guerra de Granada)은 1482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의 가톨릭 군주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란도 2세가 그라나다 토후국의 나스르 왕조를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정복 작전이다. 10년간의 전쟁 끝에 그라나다가 함락되어 카스티야 왕국으로 합병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라나다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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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콩키스타의 일부 | |||||||
![]() 프란시스코 프라디야 오르티스의 《그라나다의 항복》. 무함마드 12세 (아부 압달라)가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에게 항복하는 모습을 그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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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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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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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불명 | 100,000명 전사 / 노예화 (민간인 포함)[1] |
그라나다 전쟁은 10년 내내 계속된 것이 아니라 봄에 시작되어 겨울에 중단하는 작전 패턴을 해마다 반복하는 형태로 치러졌다. 그라나다 측은 내부 갈등과 내전으로 무력화된 반면, 카스티야 측은 전반적으로 규합된 모습이었다. 정치적인 환경 외에도 경제적으로도 그라나다는 공격과 정복을 면피하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에 '파리아' (paria)라는 조공을 바쳐야 했다는 점에서 불리하였다. 실전에서 카스티야-아라곤 측은 포병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하여 오랜 포위전이 요구되는 요새화된 도시들을 빠르게 정복해 나갔으며, 결국 1492년 1월 2일 무함마드 12세가 다스리던 그라나다 시와 알람브라 궁전이 카스티야군에 점령되면서 전쟁의 종결을 알였다.
그라나다 전쟁은 카스티야 연합왕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공동 작전으로 진행되었다. 실전에 필요한 군사와 군자금은 대부분 카스티야가 부담하였으며, 따라서 그라나다의 영토 역시 카스티야 왕국에 합병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역할은 그보다 덜하였으나, 국왕 페란도 2세가 직접 참전한 것과 더불어 해군병력과 총기, 전쟁예산 대출 등을 지원하였다. 귀족들에게 전쟁이란 새로운 영지를 확보할 수 있는 매력으로 다가왔고, 페란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그 점을 이용하여 귀족의 권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화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 가톨릭교와 이슬람교로 양분되어 공존하던 모습은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1492년에는 알람브라 칙령으로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강제 개종하거나 추방하였고, 1501년에는 그라나다의 모든 무슬림들에 대한 강제 개종, 노예화, 추방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1526년까지 그라나다 이외의 스페인 전역에 대해서도 이슬람 금지령이 확대되었다. 이렇게 개종된 '신기독교인' (콘베르소)들은 여전히 스페인 사회에서 비밀리에 이슬람교와 유대교를 신앙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2] 전쟁 이후로도 스페인은 기독교와 천주교의 수호자라는 국가적 열망을 모범으로 삼게 된다. 오늘날 알람브라의 함락은 그라나다 시의회에서 매년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으며, 그라나다 전쟁은 스페인 주류 역사학계에서 레콩키스타의 마지막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