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람 이스하크 칸
파키스탄의 제7대 대통령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굴람 이스하크 칸(우르두어: غلام اسحاق خان, 영어: Ghulam Ishaq Khan, 1915년 1월 20일 ~ 2006년 10월 27일)은 파키스탄의 제7대 대통령을 지낸 관료로,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의 사망 이후인 1988년에 1993년에 사임할 때까지 선출되었다. 그는 그와 같은 이름의 굴람 이스하크 칸 연구소의 설립자였다.
굴람 이스하크 칸 غلام اسحاق خان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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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제7대 대통령 | |
임기 | 1988년 8월 17일~1993년 7월 18일 |
총리 | 베나지르 부토 굴람 무스타파 자토이(대행) 나와즈 샤리프 발라흐 셰르 마자리(대행) 나와즈 샤리프 |
전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제6대) 후임: 파루크 레가리(제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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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출생일 | 1915년 1월 20일(1915-01-20) |
출생지 | 영국령 인도 북서변경주 반누 |
사망일 | 2006년 10월 27일(2006-10-27)(91세) |
사망지 | 파키스탄 북서변경주 페샤와르 |
국적 | 파키스탄 |
학력 | 페샤와르 대학교 |
종교 | 이슬람교 |
반누에서 자란 칸은 페샤와르 대학교늘 졸업하고 1947년 독립 후 파키스탄을 선택하면서 인도 고등문관으로 들어갔다. 1961년 아유브 칸 대통령에 의해 물과 전력 개발 당국의 초대 의장으로 임명된 굴람 이스하크 칸은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 1년 후, 그는 1975년 파키스탄의 원자 폭탄 프로그램을 보조하는 국방 장관이 되기 전에 줄피카르 알리 부토 대통령에 의하여 국립은행의 총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77년에 지아울하크 대통령에 의해 재무장관으로 유지되었고, 국가의 가장 높은 GDP 성장 평균을 감독했다. 1985년 상원 의장으로 선출된 칸은 1988년 8월 17일 지아울하크가 항공 사고로 사망한 후 대통령직으로 승격되었다. 그는 12월 13일 이슬라미 잠후리 잇테하드와 파키스탄 인민당의 합의 후보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을 지낸 최고령자 굴람 이스하크 칸은 공산주의 아프가니스탄에 맞서 매파적인 역할을 했고, 미국과의 관계는 프레슬러 수정으로 악화되었다. 국내적으로, 칸의 임기는 카라치에서 촉발된 인종 폭동에 직면했고,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그가 보수 야당 지도자 나와즈 샤리프 및 지아울하크 이후 군사 시설과의 동맹의 일부로서 그녀의 정부를 좌절시켰다고 비난했다. 칸은 수정 헌법 제8조를 발동했고, 만연한 부패와 잘못된 통치 혐의로 불과 20개월 만에 베나지르 정부를 해임했다. 샤리프는 1990년에 총리로 선출되었지만, 칸은 3년 후 비슷한 혐의로 그의 정부를 해임했다. 대법원은 해고를 뒤집었지만, 결국 정체로 인해 1993년 두 사람 모두 사임하게 되었다.
공직에서 은퇴한 칸은 고향 지방에 있는 GIK 엔지니어링 과학 기술 연구소의 학장으로 재직하여 200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는 파키스탄 역사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는 개인적인 긴축 정책으로 인정되지만, 두 정부를 축출한 독재적인 대통령직을 휘두른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