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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姜維, 202년 ~ 264년)는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무장으로 자는 백약(伯約)이며 옹주 천수군 기현(冀縣) 사람이다. 본래 위의 관리였는데 제갈량의 제1차 북벌 때 촉으로 귀순하였다. 제갈량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촉에서 주요 직책을 맡으며 중히 쓰였으며 촉한사영이 죽자 병권을 잡아 대장군이 되었다.
주로 외치를 담당하여 주도적으로 북벌 실행했고 위나라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쳤으나 당시엔 큰 공로는 없었다. 비의 사후, 본격적으로 병권을 잡고 나서 조수, 적도에서의 대승으로 한때 옹주 전체를 점령할 뻔 하기도 했고 농서에서 강족같은 이민족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단곡 전투의 패배 이후엔 별 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이후 잦은 북벌로 민생이 피폐해졌다는 이유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촉한의 멸망 후에는 위나라 점령군 종회를 이용해 촉한의 재건을 꾀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배잠론(裴潛論)에서 강유(姜維)는 촉한에서 내세운 최후의 명장으로, 삼국지연의에서는 나이가 너무 젊어 논란이 많았으나 제갈량의 후사(後事)를 받은 뛰어난 인재라는 평을 내리고 있다.
아버지 강경(姜冏)은 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으며 강유가 어렸을 때 강족으로부터 태수를 지키다 전사하였다. 정현의 학문을 좋아했으며 입신양명에 뜻이 있어 자신을 목숨 바쳐 따르는 무리를 양성하였다.[1] 군에서 상계연(上計掾)으로 근무했고, 주의 종사(―從事)도 지냈다. 아버지의 순직으로 인해 중랑(中郞)이 되어 천수군의 군무에도 참여하였다.
228년(건흥 6년)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진출하였다. 이때 옹주자사 곽회는 천수군을 순찰 중이었고, 천수태수 마준은 강유, 공조 양서, 주부(主簿) 윤상, 주기(主記) 양건(梁虔) 등을 데리고 곽회를 수행하고 있었다. 곽회는 긴급히 상규현(上邽縣)으로 달려갔고 마준도 여러 현들이 호응한다는 소식에 곽회를 따라갔다. 강유는 기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간언했지만 마준은 강유 등도 믿지 않았다. 강유는 어찌하지 못하고 태수와 떨어져 가족이 있는 기현으로 돌아왔다. 기현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제갈량의 진영으로 가 회담하는데 장합이 촉군 선봉 마속이 선점하고 있던 가정(街亭)을 뚫어냈다.[2] 제갈량은 서현(西縣)의 1,000여 가와 강유 등을 끌고 퇴각하였다.
제갈량의 촉망을 받아 창조연(倉曹掾)에 봉의장군(奉義将軍)을 겸하고 당양정후(當陽亭侯)로 봉해졌다. 230년, 정서장군(征西将軍)에 임명되고 중감군(中監軍) 혹은 호군(護軍)을 맡았다.[3] 234년, 보한장군(輔漢将軍)으로 옮기고 우감군(右監軍)을 담당했으며 평양후(平襄侯)로 진봉됐다. 238년(연희 원년) 대장군 장완을 따라 한중군에 주둔하였다. 239년 장완이 대사마가 되었다. 강유는 그 사마가 되어 소규모 분견대로 수차례 위나라를 침범하였다. 243년, 진서대장군(鎮西大将軍)으로 승진하고 양주자사를 겸하였다. 장완은 강유와 함께 상용기습작전을 기획하나 장완 본인의 병세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4]
244년 낙곡 대전에선 왕평이 시간을 끄는 사이 비의와 함께 중앙군을 이끌고 깊숙히 몰아쳐 위나라 군대를 몰아내었다.[5]
246년, 장완이 병사한 이후 그의 권한은 제갈량이 생전 안배해 둔 후계자인 비의에게로 옮겨졌다. 246년 11월, 강유는 농서로 진격하여 곽회와 하후패를 이기고 돌아왔으며[6] 247년 위장군으로 승진하고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에 오른다. 강유 역시 녹상서사였지만 비의가 대장군, 강유가 위장군인만큼 실제적으론 비의가 강유의 상관이었다. 문산군(汶山郡) 평강현(平康縣)의 반항하는 이민족들을 토벌하였다. 한편 농서군, 남안군, 금성군, 서평군 일대의 강족 아하소과,[7] 벌동(伐同), 아차새(蛾遮塞) 등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촉나라에 연락을 취하였다. 양주의 유명 호인(胡人)인 치무대(治無戴)도 이에 가담하였다. 강유가 토촉호군(討蜀護軍) 하후패가 진을 치고 있던 위시(爲翅)로 치고 올라갔으나 곽회가 풍중(渢中)을 거쳐 내려오는 바람에 후퇴하였다. 곽회는 다음 해까지 대적하는 강족들을 몽땅 소탕하였다. 강유는 패주한 치무대를 강천(彊川)으로 나가 영접하고, 음평태수 요화는 성중산(成重山)에 요새를 쌓으면서 패배한 강족들을 거둬들였다. 곽회는 부대를 나눠 하후패는 답중(沓中)에서 강유를 저지하고, 자신은 요화를 공격하였다. 강유는 위군의 뜻밖의 기동에 더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요화를 구원하러 갈 수밖에 없었다.[8]
249년, 국산(麴山)에 의거해 성 두 개를 축조하고 구안과 이흠(李歆)을 주둔시켰다. 위나라의 신임 옹주자사 진태는 그 보급로를 끊어 말려 죽이려 하였다. 구안 등은 진태를 도발하는 한편 눈을 녹여가며 어렵사리 버텼다. 강유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오자 정서장군 곽회가 조수(洮水)로 이동하며 강유의 퇴로까지 끊으려 하였다. 강유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철수하였고 고립무원에 빠진 구안 등은 저항을 포기하였다.[9] 강유는 철수하다 말고 다시 방향을 돌렸는데 남안태수 등애가 어떻게 알고 백수(白水)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에 요화로 하여금 맞은편에 진영을 설치해 그 시선을 붙잡아두고 자신은 동쪽으로 60리 거리에 있던 조성(洮城)을 습격했는데 등애는 혹시라도 강유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먼저 와있어 허사가 되었다.[10] 250년, 다시 서평군으로 출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강유는 서방의 풍속에 익숙하고 그 무재도 자신했으므로 여러 강인과 호인들의 도움을 받아 농산(隴山)의 서쪽 지역을 아우를 수 있다고 여겼다. 매양 대군을 일으키고 싶어했지만 비의가 “우리는 제갈승상이 아니오. 승상조차 중국을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야!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잘 다스려 사직을 보존해야 합니다. 대업은 능력자를 기다려야지 요행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11]라며 제지하여 10,000명 이상을 운용하지 못했다.
253년 정월, 비의가 피살당했다. 여름, 드디어 수만 명을 동원해서는 석영(石營)과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을 포위하였다. 진태가 낙문(洛門, 落門, 천수군 기현 소재)으로 와 대치하였고 강유는 식량이 바닥나 철군하였다. 254년,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를 더하였다. 농서군 적도현장(狄道―)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하였다. 이를 기회로 농서군을 휩쓸고 다녀 양무현(襄武縣)에서 서질을 무찌르고 하관(河關),[12] 적도, 임조(臨洮) 세 현의 주민들을 데려왔다.
255년, 이전에 귀순해온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같이 또 적도로 진격하였다. 국가도 작고 백성들도 힘들어한다며 무력을 남용해선 안 된다고 반대하는 장익도 대동하였다.[13] 일단 기산, 석영, 금성(金城) 세 군데로 진군한다며 거짓 정보를 흘리고는 수만 명을 통솔해 부한현(枹罕縣)[14]으로 갔다가 적도로 내달렸다. 곽회 사후 정서장군을 이은 진태는 여기에 속지 않고 옹주자사 왕경더러 적도로 나아가 자신을 기다리라 명하였다. 강유는 시간을 주지 않고 조수 서쪽에서 왕경을 대파하였다. 왕경군은 수만 명이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만여 명만이 적도성으로 물러났다. 이에 등애마저 당황하여 옹주를 포기하는게 좋겠다는 발언을 했으나 진태는 이를 거부하였다. 한편 장익이 지금의 크나큰 공적도 훼손될 수 있다며 작전을 더 지속하는 것은 사족(蛇足)이라고 말렸지만 강유는 그대로 적도를 에워쌌다.[15]
진태는 신속하게 부풍군 진창현(陳倉縣)과 천수군 상규현을 경과하고 몰래 고성령(高城嶺)도 넘어 밤중에 적도의 동남쪽 산에 당도하였다.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적도 남쪽에서 나타나자 강유는 일부 군사를 인솔하여 산을 타고 진태의 군사를 습격했으나 이미 고지에 자리잡은 진태에게 이길 수 없어 돌아갔다.
이어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강유의 퇴로를 막으려고 하자 이 계획을 들은 강유군은 즉시 퇴각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은 열흘분도 못 남았습니다. 만일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라며 진태에게 감사했다. 한편 강유는 위나라 영토 내 적도 남쪽인 종제(鍾提, 鍾題)로 군을 물렸다.[9]
256년 적도 전투의 공으로 대장군에 이르렀다. 이번엔 기산으로 출정했는데 안서장군(安西将軍) 등애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 방향을 동정으로 틀어 남안으로 질주하니 등애도 무성산(武城山)에서 맞섰다. 이에 교전해봤지만 뚫기 어려웠다. 진서대장군 호제(胡濟)와 동쪽의 상규에서 합치기로 약속하고 밤중에 위수를 건너 재빠르게 기동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약속 날짜에 호제는 제 시간에 도달하지 않았고 결국 상규 앞 단곡(段谷)에서 등애 군과 회전을 하여 대패당했다. 장수 십 수 명이 사망하고 천여급이 참수되는 등 많은 사람이 죽거나 흩어졌다.[10] 여론은 강유를 원망하였고 농서의 협력 세력들도 요동쳤다. 스스로 후장군으로 관직을 깎되 대장군의 업무는 그대로 보았다.
257년(연희 20년), 위나라의 정동대장군(征東大将軍) 제갈탄이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덕분에 관중의 병력이 동쪽으로 빠졌다. 강유는 진천(秦川) 지방을 목표로 수만 명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나서 침령(沈嶺)에 다다랐다. 그 앞의 위나라 성채 장성(長城)에는 비축된 곡물만 많을 뿐 수비병이 적어 대다수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럼에도 진태의 후임 정서장군 사마망이 막아서고, 진서장군으로 옮긴[16] 등애도 농서로부터 지원을 왔다. 강유는 망수(芒水)에 군영을 설치하고 연거푸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망과 등애는 꿈틀도 하지 않았다. 이 해, 연이은 출병으로 촉한사람들이 초췌하니 초주가 진지의 협조하에 북벌을 쉬고 때를 기다리자는 내용의 <구국론>을 짓는다.[17] 그런데 정작 초주의 구국론을 당시 사람들이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다.[18]
258년(경요 원년), 제갈탄이 패망했다는 소식에 성도로 환군하였다. 이 해, 내치를 총괄하던 진지가 죽고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잡았다. 강유는 다시 대장군 직위를 회복하였으나 262년까지 4년간 북벌을 쉬고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선주인 유비 때부터 촉나라의 방어 계획은 적을 경계서부터 겹겹이 막아 아예 한중 분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왕평이 조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낙곡 전투의 기본 전략도 그것이었다. 강유는 다음과 같이 건의하며 이를 개편하였다. “이 방법은 《주역》의 중문격탁(重門擊柝)에는 부합하지만, 적을 막기만 할 뿐 큰 이익을 꾀할 수는 없습니다. 적의 공격 징후가 포착되면 한중 일대의 군사와 곡식을 한성(漢城, 한중군 면양현 소재)과 낙성(樂城, 성고현 소재)으로 집중시켜 적을 평지로 들이고,[19] 쓰촨 분지로 향하는 관문들을 강화하는 게 낫습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해 빈틈을 노립니다. 적들은 쓰촨 분지로 진입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지기만 한 보급선에 고통받을 것입니다. 적들이 총퇴각할 때 비로소 출성하여 한꺼번에 들이치면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독한중 호제는 자동군(재동군) 한수현(漢壽縣, 옛 가맹)으로 이전하고, 감군 왕함(王含)은 낙성에, 호군 장빈(蔣斌)은 한성에 머물렀다.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에도 수비 거점을 마련하였다.
262년, 황호의 방자함을 싫어하여 처형해야 한다고 유선에게 아뢰었다. 유선은 “황호는 보잘것없는 신하일 뿐이오. 지난날 동윤이 치를 떨던 것도 내 안타까웠었소. 그에겐 신경쓸 가치가 없소.”라 답하였다. 유선과 황호의 관계는 생각보다 끈끈했기에 강유는 아차 싶었다. 황호가 유선의 칙명을 받고 사과하러 왔다. 강유는 답중에서 맥곡 농사를 짓겠다는 구실로 성도를 빠져나왔다.[20] 동년 10월(음력), 강유는 4년만에 조양(洮陽)을 찔러봤다가[21] 후화(侯和)에서 정서장군 등애에게 격파당하고 답중으로 후퇴하였다. 단곡 이후 강유는 공적을 세우지 못했고 따라서 교체하자는 의론이 있었다. 황호는 강유를 내리고 평소 친밀했던 우대장군 염우를 올리고 싶어했다. 강유는 일이 생길까 우려하여 성도로 귀환하지 않고 답중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263년, 위나라 진서장군 종회가 촉나라를 도모하고자 관중군을 훈련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좌거기장군 장익과 우거기장군 요화를 각각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에 미연에 배치해야 한다고 표를 올렸다. 황호가 무당을 불러 점을 치니 쳐들어오지 않는다는 점괘가 나와 유선은 그 표문을 공론에 부치지 않았다.
가을,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대거 남하해서야 조정에서는 요화를 답중으로, 장익과 보국대장군(輔國大将軍) 동궐을 양안관구로 파병하였다. 옹주자사 제갈서마저 건위로 남진했으므로 요화는 강유의 주요 후퇴로인 음평에서 대비하였다. 강유는 음평으로 패주하였다. 관구는 장서가 관성을 나가 항복하면서 부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호열에게 함락됐는데 장익과 동궐은 이제야 한수현에 닿았다. 종회는 한성과 낙성은 포위만 해두고 바로 촉나라의 중심부를 향해 쇄도하였다. 강유와 요화는 음평을 포기하고 장익·동궐과 합쳐 검각에서 항전하였다. 강유는 종회의 회유에 답하지도 않고 수비에만 임하였다. 종회는 검각을 돌파하지 못하고 무척이나 길어진 병참선에 철병을 고려하였다.
겨울, 등애가 측면의 무인지경인 산과 계곡 700여 리를 개척해 내려갔다. 강유(江油)의 수비대장 마막은 항복하고 광한군 면죽현(緜竹縣)을 사수하던 위장군 제갈첨은 패사하였다.[10] 검각에선 유선이 성도를 고수한다는 둥, 오나라로 망명한다는 둥, 그게 아니고 남쪽의 건녕군으로 피난간다는 둥 소문만 무성하였다. 진위를 파악하고자 광한현과 처현(郪縣) 방면으로 내려갔다. 얼마 안 가 유선의 항복 조서가 내려와 과(戈)와 갑옷을 내던지고 종회가 있는 부현(涪縣)으로 출두하였다. 장졸들은 분하여 칼로 돌을 찍었다. 종회의 왜 늦었냐는 물음에 낯빛을 바로 하고 눈물을 흘리며 오늘 보는 것만도 빠르다고 답하였다. 종회가 비범하게 여겼다.[22]
종회는 강유를 후대하여 출타할 때는 같은 수레에 태우고 앉을 때도 동석을 내주었으며 중원의 명사인 태초나 공휴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강유는 종회에게 딴 마음이 있음을 알아채고 촉나라 부흥에 이용할 목적으로 바람을 더 넣었다. “듣건대 군께서는 회남에서부터 그 계책에 허점이 없었다고 합니다. 진나라가 창대해진 것은 모두 그 덕택입니다. 이렇게 촉나라까지 정복하여 그 위엄과 덕망이 세상에 진동하니 백성들은 그 공을 존경하고 군주도 그 지모를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한신은 한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어도 천하가 평정되자 의심을 받았으며 문종은 범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그런 겁니다. 군께선 이미 엄청난 공과 덕을 이루셨으니 도주공(陶朱公=범려)이 배를 띄워 월왕 구천을 떠난 것을 본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공훈과 몸을 보전하려면 아미산(峨嵋山)에 올라 장량처럼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야지 않겠습니까?”[11] 종회는 강유의 본심도 모르고 등애를 참소하였다.
264년 정월, 등애는 체포되어 중앙으로 압송되었다. 사마소는 촉 지방의 정세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병사 10만을 장안으로 보내 대비하게 했다. 종회는 사마소의 움직임에 압박을 느끼고 서둘러 익주목을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종회는 위나라 장수들을 잡아들인 다음 수십개의 큰 구덩이를 파고 수천개의 몽둥이를 준비하여서는 외부의 병사를 불러들이게 하여 차례대로 때려죽여 구덩이 속에 넣으려 하였다.[23] 한편 강유는 종회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면 자신이 종회를 주멸하고 위나라 병사들도 죄다 묻은 후에 유선을 복위시킬 속셈이었다. 유선에게 ‘며칠만 치욕을 견디시면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평안케 하고, 어두워진 일월을 다시 환하게 하겠습니다.’라고 밀서를 전했다.[20] 종회는 강유에게 50,000명을 줘 선봉으로 삼으려 했는데 마침 구건이 음식물을 전해준다고 속이고 잡혀있던 호열을 만나 종회의 계획이 담긴 밀서를 그의 아들 호연에게 몰래 전하니 남아 있던 위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여 성도로 너나없이 몰려들었고 마침 무기를 배분하던 중인 종회와 강유를 습격하였다. 강유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두려워하는 종회에게 "오로지 적을 격퇴할 뿐."이라고 말하고 손수 위나라 군사 대여섯명을 죽였으나 결국 전사했고 종회도 살해당했다.[24] 이때 강유의 나이 63세였으며 그 시체는 참혹하게 찢겨 훼손되었고 그 처자들도 주살되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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