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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차 니케아 공의회(영어: First Council of Nicaea, 라틴어: Concilium Nicaenum Primum)는 325년 5월 20일 니케아(Nicaea, 현재 튀르키예의 이즈니크) 콘스탄티누스 1세의 니케아 별궁에서 열린 기독교 공의회다. 부활절과 삼위일체 등 논의했으며, 니케아 신경을 채택하여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보편교회(공교회)의 정치적 외연을 확대했다.
니케아에서 열린 세계 공의회는 모든 기독교권을 대표하는 회합을 통해 교회의 합의를 이루려한 첫 노력이었다. 공의회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가 주재한 것으로 여겨진다.[1][2][3] 공의회의 주요 성과는 성자 하느님의 신성과 성자와 성부 하느님의 관계에 대한 그리스도론 문제를 해결한 것이었으며,[4] 니케아 신조 첫 부분을 구성하고, 부활절 날짜를 일정하게 준수하도록 명령한 것,[5] 그리고 초기 교회규범을 공포한 것이었다.[6][7]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정치적으로는 하나지만, 신학적으로 갈라진 로마 제국의 통일과 화합을 위하여 기독교의 단결이 중요했다. 그러나 당시의 교회 내부에는 많은 교리의 대립이 있어 수습이 곤란하였기 때문에[8] 이 대립을 끝내기 위해 비티니아의 니케아에서 주교들을 소집하였다.
교회사가 소크라티스에 따르면, 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알렉산드로스는 사제와 보제 등 여러 성직자들 앞에서 '성 삼위일체의 단일성'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이때 사제 아리우스는 대주교가 정죄된 사벨리우스의 교리를 교묘히 가르친다고 생각했고, 대주교를 강하게 비판하며 말했다.[9] "만일, 성부께서 성자를 낳으셨다면, 성자는 태어났으므로 존재의 시작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자가 없던 때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성자의 본질이 무無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또한 필연적인 귀결입니다."[10] 결국, 아리우스는 대주교가 소집한 지역 시노드에서 주교와 사제들에게 심문을 받고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파문을 당했다.[11] 그러나 아리우스주의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정죄받았을지라도 동방의 일부 주교들에게서 큰 지지를 받았다.[12] 점차적으로 정치적이고 당파적인 동기가 갈등을 심화시켰다.[13]
아리우스의 가르침은 전통적으로 세 가지 기본 진술로 요약될 수 있다.[14]
필립 샤프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교가 적어도 1,800명(그리스 속주는 1,000명, 라틴 속주는 800명)이며, 참석한 주교들 외에 사제들과 보제들, 그리고 다른 수행원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대략 1,500명에서 2,000명 사이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했다.[15] 공의회에 참석한 케사리아의 에브세비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오스, 안티오키아의 에프스타티오스는 각각 250명[16], 318명[17], 약 270명[18]으로 추산했다. 에바그리오스[19]와 이에로니모스[20], 루피누스[21] 또한 318명으로 기록했으며, 테오도레토스도 동일한 언급을 한다.[22] 소크라티스는 300명 이상이라고 했다.[23]
공의회에는 압도적으로 많은 동방 교회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반면 서방 교회에는 단 7명의 주교가 참석했는데, 이들은 코르도바의 호시우스, 디종의 니카시우스, 카르타고의 카이실리아누스, 스트리도의 돔누스, 밀라노의 유스토기우스, 칼라브리아의 마르쿠스이며, 연로한 로마의 실베스테르를 대신해 비투스와 빈첸시우스가 대리로 파견되었다.[15]
참석한 대주교는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드로스와 안티오키아의 에프스타티오스였으며[24], 두드러진 주교들은 니코메디아의 에브세비오스와 케사리아의 에브세비오스, 예루살렘의 마카리오스[24], 아르메니아의 아리스타케스, 니시비스의 야코보스[22], 라리사의 아힐리오스, 스피리돈, 고트족의 테오필로스, 강그라의 이파티오스, 네오케사리아의 파울로스[22], 니케아의 테오그니스, 사르디카의 프로토게네스, 페르시아의 요한, 피티우스의 스타토필리오스, 프톨레마이의 세쿤두스 등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주교와 함께 동행한 보제 중에는 훗날에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가 되는 아타나시오스도 있었다.[24] 비잔티온의 주교 메트로파네스의 대리자로 알렉산드로스가 참석했다고도 한다.[25] 또한 전설에 따르면, 니콜라오스는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해야 한다.[26]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참석하는 주교들에게 공공 수송 수단과 수송을 위한 말들을 지급하는 한편,[27] 숙박비를 포함한 참석자의 여행 경비를 모두 부담했다.[28]
주교들이 도착한 후 콘스탄티누스가 공식적으로 입장하면서 공의회를 열었는데, 에우세비우스는 그를 "마치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천사처럼, 그의 환한 망토가 빛줄기처럼 빛을 발하고, 자주색 예복의 불 같은 광휘로 빛나며, 금과 보석의 눈부신 광채로 꾸며져 있었습니다."라고 묘사했다.[29] 그런 다음 그는 (대부분의 참석자가 사용하는 그리스어 대신) 라틴어로 개회 연설을 했다.[30] 5세기 교회사가 소크라티스는 325년 5월 20일을 개회 날짜로 기록했지만, 6월 이후였을 수도 있다.[31][32]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 공의회 토론에 참여했지만, 그는 주교가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투표권자로 보지 않았다.[33] 후대의 공의회처럼 상세한 공의회 문헌(acta)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토론의 정확한 순서는 불확실하다.[34] 당시 교회회의는 로마 원로원의 회의 진행 방식을 본떠서 사회자가 많은 권한을 갖고 참가자들은 위계에 따라 차례로 발언했다.[35] 아마도 가장 먼저 고려된 문제는 안티오키아에서 정죄된 케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와 다른 주교들의 지위였는데, 이는 그들이 남은 공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그의 신앙고백은 받아들여졌고 그는 복권되었다.[36] 안티오키아의 에프스타티오스의 기록에서는 공의회에서 거부된 에우세비우스의 신앙 진술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 에우세비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일 수도 있다.[37]
더 이른 신조들에 기반한 신앙 진술이 (아마도 소규모 위원회에서) 작성되었고, 공의회에서 각 항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두 명을 제외한 모든 주교들은 채택된 신조의 최종 형식에 서명했다.[38] 아리우스주의 문제 외에도 공의회는 부활절 계산도 고려했고, 여러 동방 주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방법을 채택했다.[39] 또한 주교들은 멜레티오스 분열[40]에 대한 결의안에 동의하고 20개의 교회 규범을 제정했다.[41] 공의회는 7월 첫 주에 페회했으며, 주교들은 7월 25일 콘스탄티누스의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에 초대받았다. 주교들과 황제는 공의회의 결정을 담은 서한을 발행하여 제국 전역에 배포했다.[42]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래와 같은 고백문을 신앙고백문으로 결정했다. 니케아 신조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때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조로 개정되었다.
-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 그리고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성부로부터 나시어, 곧 아버지의 본질에서 나셨고,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고,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 곧 하늘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창조되었음을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시어, 하늘로 올라가셨으니,
-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습니다.
-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
-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나시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비존재에서 생겨났다'라고 말하는 이들이나, '다른 위격 또는 본질에서 존재한다'고, 또는 하느님의 아들은 창조되었으며, 변할 수 있으며,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서 파문합니다.][43]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한 20개의 교회 규범이다.[44] 다음은 그 요약이 번역된 것이다.
그러나 이 회의로 교리 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후에 더욱 격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회의에 있어서 황제의 권력이 교회 내의 문제에 개입하는 악례(惡例)를 남긴 것은 주목할 만하다.[8]
황제는 신조를 지지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모두 추방될 것이라고 했던 말을 이행했다. 아리우스, 테오나스, 세쿤도스는 신조를 따르기를 거부했고 파문되어 일리리아로 추방당했다. 아리우스의 글들은 압수되어 분서되었으며,[45] 아리우스의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 곳곳에서는 논쟁이 계속됐다.[47]
기독교는 최근에야 제국에서 합법화되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는 갈레리우스 치하에서 311년에 끝났다. 갈레리우스가 박해를 중단했지만, 기독교는 313년까지 법적으로 보호되지 않았고, 그 당시 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알려진 것에 동의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법적 보호와 관용을 보장했다. 그러나, 니케아 기독교는 380년 테살로니카 칙령까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지 못했다. 그 동안 이교는 합법적이었고 공적인 일에 존재했다. 니케아 공의회까지 콘스탄티누스의 주화와 다른 공식적인 모티프들은 솔 인빅투스의 이교도 숭배와 그를 연관시켰다. 처음에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신전의 건설을 장려하고[48], 전통적인 희생제사를 용인했다.[49] 그의 통치 후반에, 그는 로마 신전들을 강탈하고 허물기 위한 명령을 내렸다.[50][51][52]
니케아에 관한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은 제국의 최고 시민 지도자이자 권력자였다. 황제로서 시민 질서를 유지하는 책임은 그의 것이었고, 그는 교회가 한 마음으로 평화롭기를 원했다. 아리우스 논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소요를 처음 알렸을 때 그는 "크게 골머리를 앓았다"며 아리우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주교 모두 소요를 촉발해 공공연하게 된 것을 "책망했다".[53] 부활절과 관련해서도 "의견의 다양성"을 인식하고 두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를 희망하면서 지역 시노드를 구성하고 "분열된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존경받는" 코르도바의 호시우스 주교를 보냈다.[53] 그 사절이 실패하자, 그는 니케아에서 시노드를 소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모든 나라에서 교회 중 가장 저명한 사람들"을 초청했다.[54]
콘스탄티누스는 주교들이 주교좌를 오가는 여비와 니케아에서의 숙박비를 공적 자금으로 충당하도록 함으로써 공의회 소집을 지원했다.[55] 그는 또한 "손님들을 품위 있게 대접하기" 위해 토론 장소로 "궁전 안에 ... 큰 홀"을 마련해 제공했다.[55] 공의회 개회 연설에서 그는 "주교들에게 만장일치와 화합을 권고"하고, "그러므로 모든 논쟁적인 논쟁을 버리고 신적 영감의 말씀에서 논쟁이 되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자"라며 성서를 따를 것을 촉구했다.[55]
그 후 아리우스와 교회 교리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양측의 연설에 끈기 있게 주의를 기울였고" 주교들의 결정을 "따랐다."[56] 주교들은 먼저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저주하고 신조를 올바른 교리의 진술로 공식화했다. 아리우스와 두 추종자가 동의하지 않자, 주교들은 이들을 교회에서 출교함으로써 성직적 판단을 내렸다. 성직적 결정을 존중하면서, 계속되는 불안의 위협을 본 콘스탄티누스도 이들을 추방하는 민사적 판단을 내렸다. 이는 기독교 내에서 교리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세속 권력을 사용하는 관행의 시작이었으며, 이후 모든 기독교 황제들이 이 사례를 따르면서 기독교 폭력의 순환과 순교에서 나타난 기독교적 저항의 순환으로 이어졌다.[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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