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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시 공작 장드디외 술트[참고 1](Jean-de-Dieu Soult)는 1769년 3월 29일 생타망라바스티드(현 타른 주 생타망술트)에서 태어나 1851년 11월 26일 사망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인이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11월) |
장드디외 술트 Jean-de-Dieu Soul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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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드디외 술트. | |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 및 1845년 11월 10일부로 전쟁장관 | |
술트 내각 3기 | |
임기 | 1840년 10월 29일-1847년 9월 18일 6년 10개월 20일 |
전임 | 아돌프 티에르 아메데 데팡퀴비에르 |
후임 | 프랑수아 기조 알렉상드르 몰린 드 생툥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 및 프랑스 외무장관 | |
술트 내각 2기 | |
임기 | 1839년 5월 12일-1840년 3월 1일 7개월 20일 |
전임 | 마티외 몰레 |
후임 | 아돌프 티에르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 및 프랑스 전쟁장관 | |
술트 내각 1기 | |
임기 | 1832년 10월 11일–1834년 7월 18일 1년 9개월 7일 |
전임 | 카지미르 페리에 |
후임 | 에티엔 제라르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프랑스 전쟁장관 | |
자크 라피트 내각 카지미르 페리에 내각 장드디외 술트 내각 (1) | |
임기 | 1830년 11월 17일–1834년 7월 18일 |
전임 | 에티엔 제라르 |
후임 | 에티엔 제라르 |
군주 | 루이 필리프 1세 |
신상정보 | |
출생일 | 1769년 3월 29일 |
출생지 | 타른 생타망라바스티드 |
사망일 | 1851년 11월 26일 |
사망지 | 타른 생타망라바스티드 |
경력 | 장군 |
정당 | 무소속 |
종교 | 가톨릭 |
장드디외 술트 Jean-de-Dieu Soult | |
별명 | 유럽 제일가는 책사 니콜라 왕 팔씨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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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프랑스 왕국 프랑스 입헌왕국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부르봉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
복무기간 | 1785년 - 1815년 |
최종계급 | 프랑스 대원수 |
주요 참전 | 제2차 취리히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아일라우 전투 하일스베르크 전투 바우첸 전투 툴루즈 전투 |
기타 이력 | 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
서훈 | 달마시 공작 벨기에 레오폴 대훈장 구조 대십자 훈장 황금양모 기사 생위베르 대훈장 프랑스 상원의원 생루이 훈장 기사 생테스프리 훈장 기사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 |
1804년 5월 19일 제국 원수에 임명된 술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1805)에서 결정적 기여를 하였으며 나폴레옹은 술트를 두고 “유럽 제일가는 책사”라고 평했다. 술트는 다부, 란, 마세나, 쉬셰와 더불어 황제가 부재할 시에도 군대를 지휘할 역량이 있는 몇 안되는 원수였다.
또한 술트는 프랑스 대귀족이 되며 (1815년, 이후 1827년) 특히 7월 왕정하에서 중요한 정치 경력을 쌓기도 했다. 술트는 전쟁성 장관으로 1831년 외인부대 창설의 주요 인물이다. 술트는 정부 수반을 세 차례나 맡으며 프랑스의 정부 수반 가운데서 가장 오랜 임기를 지냈다. (총 9년 3개월 17일, 연속해서 맡은 기간은 6년 10개월 20일) 1847년 술트는 루이 필리프 1세으로부터 “프랑스 대원수”라는 특별 칭호를 받았다.
1769년 3월 29일 프랑스 생타망라바스티드에서 왕실 공증인 출신의 아버지 장 술트(1726-1779)와 그르니에 가문 출신[1]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장드디외 술트는 변호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1785년 4월 16일 술트는 아버지의 사망 이후 금전적으로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16살의 나이로 왕실 보병 연대에 병졸로 입대한다. 남동생 피에르브누아는 3년 후 형을 따라 입대한다. 술트는 6년간의 군복무 이후 중사가 되었다.
술트는 1794년 6월 플뢰루스 전투에서 공을 세워 프랑수아 조제프 르페브르의 추천으로 장군이 되어 1799년 3월 슈토카흐 전투에서 르페브르를 대신해 싸우기도 했다.
술트는 1805년 ~ 1806년에 울름 전투,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등에서 승리해 명성이 높아졌으나 1807년 폴란드 아일라우 전투와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진 못했다.
나폴레옹 1세는 1813년 3월 술트에게 대육군 4군단의 지휘권을 주어, 술트는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바우첸 전투에서 4군단을 지휘하게 된다.
1814년 4월 10일 술트는 툴루즈 전투를 개시한다. 술트는 쉬셰 장군이 자신의 군대에 합류하는 것을 설득하는데 실패했으며 결국 웰링턴 경에 이기지 못하여 톨루즈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그 뒤 1814년 제1차 왕정복고 때는 왕당파로 자처했으나 1815년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때 다시 보나파르트 편으로 돌아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참모장 노릇을 했다. 하지만 그루시의 별동대를 불러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내라 나폴레옹이 명령했을 때 전령을 1명만 보내는 등 처음 맡아보는 참모장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다 워털루 전투 패배에 일조한 셈이 되었다. 야전사령관에 능한 그가 처음 맡는 참모장에 임명한 나폴레옹의 잘못도 있지만.
술트는 결국 제2차 왕정복고(1815~30)의 개막과 더불어 추방당했다가 1819년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았다.
루이 필리프 통치 때는 3번이나 내각을 이끌었고(1832년 10월 ~ 1834년 7월, 1839년 5월 ~ 1840년 3월, 1840년 10월 ~ 1847년 9월), 국무원 의장과 육군장관을 줄곧 역임했다. 1840년대에는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848년 루이 필리프가 왕좌에서 쫓겨나자 자신은 공화주의자라고 선언했다. 그의 《회고록》이 1854년에 3권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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