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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생한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 또는 인더스 계곡 문명(Indus Valley Civilization)은 약 5300년 전부터 3700년 전까지 존재했던 청동기 문명이다. 전성기는 약 4600년 전부터 3900년 전 사이이다. 이 문명은 인더스강과 현재 파키스탄과 북서쪽 인도에 걸친 가가하크라강(Ghaggar-Hakra)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 발굴된 유적지가 하라파에 있었기에 가장 부흥했던 시기의 문명은 하라파 문명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인더스 가가 하크라 문명(Indus Ghaggar-Hakra civilization), 인더스 사라스바티 문명(Indus-Sarasvati civiliz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인더스 사라스바티라는 이름은 가가 하크라강을 리그 베다에 나오는 사라바스티강으로 보는 견해에서 나왔다. 그러나 언어학적, 지리학적 관점에서 이 이름이 적당한가에 관한 논란이 있다.[독자연구?]
1920년대부터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발굴을 계속하고 있다.
아라비아해에서 인도 타르 사막까지, 페르시아 지역에서 중앙아시아 평원까지 이르는 광대한 인더스 문명 지역에는 현재까지 1500군데가 넘는 유적(1058곳의 정착지와 나머지 야영지)가 발견되었고, 인도대륙 북서부에만 약 130만 평방킬로미터 지역에 퍼져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 지역의 두 배 정도 넓이에 달한다.[1]
대표적인 유적 도시는 모헨조다로, 하라파, 간웨리왈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라키가리, 돌라비라 등이다. 도시들은 인더스강과 지금은 사라진 사라스바티강을 지나면서 지그재그 패턴으로 자리잡고 있다.[2] 인더스 사람들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수메르인들과 활발히 교류한 것으로 보이며, 그 때문에 그 지역에서 온 인장 등이 유물로 발견됐다.
최근에는 인더스 문명과 페르시아 지역 고대 문명의 유사성을 주목하면서 인더스 계곡이나 발루치스탄의 유적과 유물의 기원이 페르시아 지역에서 연유했다는 주장도 있다.[3]
대륙 빙하가 사라진 후인 1만 년 전 홀로세 초기부터 인더스 계곡 지역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미국 고고학자 조너선 마크 케노이어는 선행 문명인 메르가르 지역의 역사를 포함해 인더스 문명의 역사를 크게 식량 생산 시대, 지역화 시대, 통합의 시대, 지방화 시대 등 네 시기로 나눈다. 인더스 문명 최대의 신비 중 하나는 초기 문명과 전성기 문명(통합의 시대) 사이에 연관성이 매우 적다는 점이다.
메르가르 지역에서 8500년 전부터 7000년 전까지 이어진 초기 식량 생산 시대에 사람들은 흩어진 취락에서 살거나 유목민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밀과 보리를 재배하고, 소, 양, 염소, 닭 등을 길렀다. 쌀은 재배된 흔적은 있으나 주식은 아니었다. 콩, 호밀, 참깨, 겨자도 재배했다.[4]
이곳에서 발견된 작은 사각형 진흙 벽돌 주택은 객실과 창고가 칸막이로 구분되어 있으며, 창고는 주로 곡물 등을 보관하는 데 쓰였다. 아직 정교한 도자기 기술은 발달하지 않았으나, 역청으로 칠해진 바구니가 주택과 무덤에서 발견되었고, 바다 조개, 동물 뼈, 다양한 색깔의 돌로 만들어진 목걸이와 장신구들이 무덤에서 발견됐다.[5]
약 7000년 전부터 5600년 전까지 이어진 지역화 시대에는 건축이 발전하고 농업과 목축 기술이 발달했다. 아울러 녹로로 만든 도자기 등 서로 다른 도자기들이 개발됐고, 야금술, 여러 가지 돌을 갈고 다듬어 장신구로 만드는 보석 세공 기술, 유약 바른 토기와 인장을 포함한 다양한 공예품이 발명됐다. 이 기술들은 강과 산길로 이어진 교역 네트워크를 통해서 사방으로 서로 연결됐다.[6]
기하학적 인장들은 테라코타, 뼈, 상아로 만들어졌고, 도자기에 새겨진 글자들로 문자가 발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암리, 코트디지에 그 유적이 있고, 후기에는 하라파 초기 도시와 시기가 중첩된다. 벽으로 둘러싸인 정착지, 다양한 스타일의 도자기와 장신구, 인장의 사용과 가장 기본적인 문자, 무역 네트워크의 확장 등 도시화 초기 단계를 보여 준다.[6]
통합의 시대는 인더스 문명의 전성기로 약 4600년 전부터 3900년 전 사이이다. 갑자기 발생한 듯 보이는 이 시기에 인더스 문명에 속한 도시들과 주변 정착지는 현재 파키스탄과 북서부 인도 지역을 지배했으며, 지리적 한계를 넘어 문화적 융합을 보여 준다.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 대도시를 건설하고 계층적 사회 질서를 이룩했으며, 청동기와 구운 벽돌을 사용하고 법과 도량형을 만들었다.
또한 배수시설, 대중목욕탕, 창고, 곡물 저장소, 사원 등 발달된 도시 시설을 갖추는 등 도시 계획에 따라서 도시를 건설했으며, 새로운 양식의 채색 도자기를 개발하고, 홍옥수를 사용하는 등 장신구 기술을 혁신했으며, 종교적 물건 등에 통합된 상징을 사용했다.[7] 이 시기에 다양한 재질의 옷감과 다양한 색채의 염색기술이 발달했으며, 남녀 모두 고도로 섬세하게 제작된 장신구를 신체 또는 옷에 달았다.[8]
이 시기 유적지 136곳 중 132곳이 새로운 정착지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옛 도시를 버리고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정착하길 좋아했다. 적어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9] 이유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전염병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지방화 시대에 인더스 문명은 문화적 통합 이전 시대로 돌아간다. 지역 무역 네트워크와 유물 양식에서는 이전 시대를 계승하지만, 정치 경제 구조가 쇠퇴하고 붕괴하며, 지역별로 작은 규모의 집단들이 나타난다. 인장, 글, 도량형 등이 사라지고, 매장 관행과 종교 의식에 사용하는 물건들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쇠퇴와 멸망의 원인은 분명하지 않다. 약 1500년경 전부터 시작된 인도아리아인의 침입, 인더스강의 범람과 이에 따른 경로 변화, 수백만 개의 벽돌을 굽기 위한 대규모 삼림 파괴, 사라스바티강의 소멸 등이 지목된다.
이전에는 아리아인의 침입에 의한 멸망을 주 원인으로 보았으나, 성채 파괴나 신체 손상 유골의 대규모 발굴 등이 없었으므로 오래지 않아 폐기되었다.[10] 인더스강의 범람에 따른 멸망설도 곧 폐기되었다. 모헨조다로에는 범람으로 인한 대규모 파괴가 세 차례나 일어났으나, 사람들이 곧 돌아와서 도시를 재건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대규모 삼림 파괴 및 농경으로 인한 토지 건조화 등을 그 원인으로 여긴다.[11] 인도 쪽 학자들은 인도 영토에 있는 사라스바티강의 소멸을 원인으로 지목하나 무리한 주장이다.[10] 이후 베다 문명이 들어선다.
인더스 문명을 남긴 이들의 인종 구성은 복잡하다.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14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지중해, 몽골, 알프스 인종 등으로 다양했다. 서로 언어도 달랐을 것으로 짐작되고, 문화적 이질성도 뚜렷했다. 그러나 하라파, 모헨조다로가 번성하던 전성기에는 문화적 동질성도 함께 표현되었다.[12]
흔히 인더스 사람들은 현재 남인도에 사는 검은 피부에 코가 납작한 드라비다인으로 여겨지며, 타밀어의 근원이 되는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13] 인더스강 유역에서는 날과 즈홉 문화권 사람들이 도시를 건설한 발루치스탄 언덕에서 브라후이 사람들은 드라비다어의 한 갈래인 브라후이어를 사용한다.[14]
인더스 문명은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고,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대목욕탕을 제외하면 종교적 의미의 시설물은 없었다. 인더스 문명의 통치자들은 정복보다는 무역에 치중했고, 상인 계급이 통치에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15]
인더스 문명의 유적에는 왕궁 같은 형태의 강한 권력을 나타내는 거주지가 없고, 관료 조직 등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으며, 귀족들의 호화로운 무덤도 없고, 기념비적 공공장소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농사나 목축에 종사하는 사람들 외에 장인, 필경사, 건축가, 조각가 등 다양한 계급과 직업이 존재하는 등 대단히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다는 것은 분명하나, 국가를 형성했다는 증거는 뚜렷지 않다.[16]
인류학자들은 인더스 문명이 모계 사회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하며, 생산력의 근원인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던 것으로 본다.[17]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를 중심으로 한 여러 유적에서는 수많은 저울추들이 발견되었다. 추의 크기는 보석 크기를 잴 수 있을 만큼 작은 것에서 무거운 것까지 다양했다. 또한 벽돌 크기도 높이, 넓이, 길이가 1:2:4 비율로 일정했다. 이는 이 지역에 도량형이 도입되었고, 이를 강제할 만한 권력이 (적어도 의회나 부족장 협의체 형태로라도) 존재했음을 암시한다.[18]
인더스 지역에서 목축과 농경의 역사는 약 9000년 전부터 시작되어 5000년 경 인더스 평원으로 이주하면서 급속히 발달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목축과 농경에 종사했다. 그들은 소, 양, 염소 등을 가축화했으나, 돼지와 말은 아직 가축으로 삼지 않을 듯하다. 목축은 주로 고지대에서, 농사는 주로 강의 저지대에서 행했다.[19]
밀과 보리가 주식이었고, 쌀은 재배되긴 했으나 미약했다. 콩, 호밀, 참깨, 겨자, 대추, 포도도 재배했다. 모헨조다로, 하라파 등에서 커다란 곡물 창고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풍족한 곡물이 생산되었다.[19] 해안가에서는 물고기를 먹었고, 이를 절이거나 말려 먼 곳까지 가서 판매했다.
인더스 사람들은 세계 최초로 면화를 재배했다. 면화가 이 지역에서 재배되었기에 그리스인들은 면직물 이름을 지역 이름 신드(Sindh)에서 따와 신돈(sindon)이라 불렀다.[20] 인더스 사람들은 실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었고, 그 재료로 양털과 무명실을 사용했다.
수공업과 상공업도 발전했다. 장인 계급이 형성되어 다양한 생활용품과 장신구 등을 만들어 쓰고, 이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인도 내륙에 이르는 광대한 고대 무역 네트워크를 이용해 판매했다. 인더스 사람들은 청동, 금, 은, 테라코타, 유리세라믹, 준보석 등으로 만든 정교한 장신구와 토우 등을 주변 민족들과 거래했다.[21] 무역 활동은 남인도의 마이소르나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 등의 사금이 물물교환으로 집적되어 호화로운 금제 장신구나 은제 뚜껑이 달린 용기 등으로 제작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인더스 문명은 구운 벽돌을 사용해 대형 건물을 축조하고, 벽돌로 높은 벽을 쌓는 기술을 개발했으며, 복잡한 도시 배수 체계를 구축했다.
모헨조다로와 돌라비라 등의 도시는 정교한 배수 체계, 집안 목욕 시설, 대목욕탕, 많은 벽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인더스 문명이 물 관리를 도시 건설의 중심에 놓았음을 알려준다.
많은 벽들은 물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했고, 벽돌 수로를 이용한 배수 체계는 폐수를 안전하게 처리해 주택과 도시의 오염을 방지했다. 또한 집안 목욕 시설은 인더스 사람들이 목욕과 청결함을 중시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목욕탕은 중요한 의식을 위한 공간으로 도시의 지배 계층이나 엘리트들이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22] 그 앞에서 동물 희생제를 올리는 데 쓰이는 벽돌 제단이 발굴되었는데, 이에 따라 대목욕탕이 희생제를 치르려고 시민들 모두가 모여서 목욕 재계하는 공간이라는 주장도 있다.[23]
인더스 문명에는 신에게 기도나 제사하는 거대한 규모의 신전이나 기념비적 공공장소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물론, 이 사실이 그들에게 종교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8]
1931년 하라파를 발굴한 영국 고고학자 존 마셜은 파수파티 인장에 새겨진 ‘머리에 뿔 모양의 머리 장식을 쓰고, 남근이 발기된 채 동물 네 마리에 둘러싸여 요가 자세를 하고 있는 신격체’가 힌두교 시바 신의 원형이라 주장했다.[8]
인도의 고대사학자 람 샤람 샤르마에 따르면, 인더스 사람들은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대지를 어머니 신으로 섬겼다. 인더스 지역에서는 자궁에서 식물이 자라나오는 모습을 나타낸 여성상 등 여성 모습을 한 작은 테라코라 상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이들은 풍요한 생산을 가져다 주는 대지의 어머니 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한 하라파 유적에서 발견된 소형 여성 조각은 부채 모양 머리 장식, 돌출 부위에 남겨진 유연, 펜던트가 부착된 여러 가지 목걸이 장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모신(母神)'일 것이다.[8] 이 여신이 힌두교에서 말하는 프리티비 여신과 연결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밖에 힌두교 시바 신앙으로 자리 잡은 초기 신들의 모습이 테라코타로 남겨져 있고, 인더스 사람들이 숭배했던 여신상이나 요가 자세를 취한 수행자 등이 인장과 조각상으로 나타난다.[24] 이는 요가와 해탈사상의 기원이 인더스 문명에 있다는 학설의 증거로도 제출된다.[25]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26]
한편, 부처의 깨달음과 관련 있는 보리수 숭배의 기원도 인더스 문명이고, 힌두교에서 가장 널리 퍼진 신앙 형태인 세정 의례 또한 그 기원을 인더스 문명에 두고 있다.[27] 이는 아리안족 침입 이후에도 인더스 문명이 살아 남아 힌두 민중들 사이에서 이어져 왔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전성기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1058곳 중 755곳(71%)이 새로운 장소에 건설되었고, 초기 문명의 유적지 523곳 중 324곳(62%)은 전성기 인더스 문명이 오기 전에 버려졌다. 인더스 사람들은 옛 도시를 과감히 포기하고 새로운 도시로 끝없이 이주하려는 성향이 있었다. 이들은 과거를 바꾸려 할 때마다 새로운 체제나 삶의 방식으로 과거를 대체하려 한 허무주의자들이었다. 인더스 사람들은 오래된 전통이 남아 있는 것보다는 새로운 이념적 사상이 번영할 수 있는 새로운 정착지에 살기를 원했고, 이는 모헨조다로 같은 계획된 신도시로 나타났다. 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에 도전했다.[28]
인장에 새겨진 수많은 상형문자로 미루어 보아, 이들이 문자를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토판이나 문서로 쓰인 글은 발견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중 언어로 이루어진 비문 등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아직 해독은 불가능하다. 이 문자는 수메르어, 엘람어, 미노스 문자, 히타이트어 등 동시대 다른 고대 언어와 유사성이 없고, 산스크리트어 등 후대의 언어와도 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9] 문자의 숫자는 250~400자 정도이다.[30]
유적에서는 그림이 그려진 도자기, 정교한 장식, 테라코타로 만든 토우, 석회암으로 만든 조각상, 동석(凍石)으로 만든 호부(護符), 인장, 점토 또는 귀금속으로 만들어진 장신구 등이 출토됐다. 이를 만들기 위한 전문 수공예 기술이 발달했다. 술을 만들어 먹은 흔적은 있으나, 실제로 음주 문화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죽은 후 시체를 땅에 묻는 매장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이외의 유적에서는 남녀를 합장했다.[31]
테라코타 토우는 신상, 동물, 완구류로 나뉘는데, 모두 점토를 손으로 반죽해서 만든 단순 소박한 모양이면서도 힘차고 늠름한 미의식을 엿볼 수 있다.
신상 토우는 풍요와 다산의 기원 대상으로, 유방이나 허리만 과장한 어머니 여신 부류가 많고, 눈과 코를 극단적으로 생략하고 머리의 상투나 장신구를 되는 대로 만든 데다 표정이 파충류와 흡사한 그로테스크한 것도 있다. 사제 등을 조각한 것도 있다.
동물 토우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은 혹이 없는 외뿔 황소이며, 들소, 코끼리, 혹 있는 황소, 무소 등도 흔히 나타난다.[32] 인더스 사람들이 일상에서 친근히 여겼던 황소, 공작, 원숭이, 양, 거북 같은 것도 자주 보이는데, 거칠고 소박한 솜씨로 동물의 특징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기가 과장되어 있는 토우도 발견되는데, 이는 남근 숭배와 관련이 있다.[33]
소박한 솜씨의 테라코타 토우에 비해서, 석회암이나 청동으로 만든 조각상은 제작자와 주문자 모두 테라코타를 애호한 평민과 이질적인 사람들로 보이며, 조형 감각이나 표현 기법은 놀랄 만큼 뛰어나다. 하라파에서 출토된 석회암으로 만든 토르소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든 '춤추는 소녀' 등을 보면, 양감의 파악이나 육체의 사실적 관찰에 의한 모델링의 적확한 표현 등이 현대의 조각상에 뒤지지 않는다. 왼쪽 팔에 팔찌를 한 채 나체로 춤추는 이 날씬한 소녀는 청동기 예술의 걸작으로, 인더스문명 사람들이 유희를 즐겼음을 암시한다.
인더스 문명의 독창성과 섬세한 세공 기술을 보여 주는 전형적 유물이다. 한 변이 6센티미터보다 작은 크키로 만들어진 이 인장들은 2000점가량 발견되었다. 상형문자와 함께 악어, 물소, 호랑이, 코뿔소, 양, 코끼리 등을 정밀하게 음각했다.[34]
동석으로 만든 호부(부적), 인장 등은 거기에 새겨진 인더스 문자가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용 목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부적들은 정령 숭배 또는 수목 숭배 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후대에 베다 문명 속에 서서히 파고드는 형태로 살아남았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35]
인장에는 외뿔황소, 공작, 무소, 코끼리, 보리수 등의 형상이 치밀하고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이 인장들은 토테미즘 부적이나 소유권 표시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인더스 인장들은 서아시아 엘람 지방이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우르, 키시)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는 두 문명이 무역을 통해 평화롭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며, 인장이 무역 관련 통행증이나 수령증 등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다.
그 밖에 녹로를 사용하여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고 붉은 바탕 표면에 검은 무늬를 그린 뚜껑 달린 항아리 종류가 있는데, 이런 소성 채문 토기(燒成彩紋土器)는 이란의 채문 토기 문화와 유사한 조형, 채화 기법을 보인다.
한편, 보석 세공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홍옥수, 청금석, 구리, 터키석 등으로 만든 구슬들을 엮어 허리, 목, 손목을 장식했고, 수준 높은 홍옥수 구슬 목걸이를 만들어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수출했다.[36]
검은빛 또는 초록빛을 띄는 원통형 부적이 조개 팔찌와 함께 여성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팔찌는 착용자의 결혼, 사회적 소속, 지위를 규정할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봉헌의 의미가 있으며, 밀폐된 원으로 신에게 보호 받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36]
모헨조다로에서는 점토, 돌, 상아, 도자기,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화장품 용기들이 다수 발견됐다. 오일, 연고를 담은 용기도 있으나, 대부분은 눈꺼풀 등을 검게 칠하는 데 쓰는 가루를 담았다. 구리, 청동, 나무로 만들어진 화장 막대도 함께 발견됐다.[37]
인더스 문명과 후대의 아리아인이 건설한 베다 문명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으나, 아직 그 직접적 영향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인더스 사람들이 호전적 유목민인 아리아인에게 무력으로 정복되었으나, 문화나 종교 측면에는 더 우월했기 때문에 오히려 아리아인들이 인더스 문명의 종교를 점차 수용했으며, 이에 따라 힌두교는 아리안 요소와 비아리안 요소들의 융합의 결과라는 주장이 흔히 제기된다.[38] 오래된 인더스 문명은 멸망했지만, 새로운 문명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39]
『나티야 샤스트라』 같은 인도 고대의 연극 이론서에 창조신 브라흐마가 수드라 계층의 요구에 따라 모든 신분의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다섯 번째 베다를 만들어 연극으로 공연하게 하면서 바라타와 그 아들 100명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올리게 한 것을 두고 브리스키는 아리아 문명이 비아리아 문명을 수용하는 과정이 반영되었다고 본다. 특히, 하위층의 민속 기술인 연극을 통해 이를 달성한 것은 모헨조다로, 하라파 도시 문명(인더스 문명)은 패배했으나, 패배한 것은 지배층이었고, 하위 계층 문화는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0]
파키스탄 쪽 문헌에서는 모헨조다로인들이 힌두인들의 선조라고 주장한다. 힌두(Hindu)는 인더스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신두(Sindhu)에서 나왔는데, 힌두는 신두의 페르시아어음 변형이라는 것이다.[41]
인더스 문명과 갠지스 문명은 다른 문명이다. 우르두어에서 인도를 일컫는 단어인 바라트(Bharat)에서 알 수 있다. 바라트는 갠지스강 중류 지역을 가리킨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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