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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18대 임금 (1127–1173)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의종(毅宗, 1127년 5월 23일 (음력 4월 11일)[1] ~ 1173년 11월 7일 (음력 10월 1일)[2] )은 고려의 제18대 국왕(재위 : 1146년 ~ 1170년)이다. 왕태자 책봉 교서에 따르면 의종은 용모가 빼어났다고 한다.
의종 毅宗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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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고려 국왕 | |
재위 |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2일 (음력) |
전임 | 인종 |
후임 | 명종 |
고려국 왕태자 | |
재위 | 1133년 2월 17일 ~ 1146년 2월 28일 (음력) |
전임 | 왕태자 구 (인종) |
후임 | 효령태자 |
이름 | |
휘 | 왕현(王晛) |
묘호 | 의종(毅宗) |
시호 |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
능호 | 희릉(禧陵) |
신상정보 | |
출생일 | 1127년 4월 11일(음력) |
출생지 | 고려 개경 정궁 |
사망일 | 1173년 10월 1일(음력) | (46세)
사망지 | 고려 동경 곤원사 |
부친 | 인종 |
모친 | 공예왕후 임씨 |
배우자 | 장경왕후 김씨, 장선왕후 최씨 |
자녀 | 1남 3녀 (4남 12녀)
효령태자, 경덕궁주, 안정궁주, 화순궁주 |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능호는 희릉(禧陵)이다. 인종과 공예태후 임씨(恭睿太后 任氏)의 맏아들이다.
왕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으나 끝내 정변으로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났고 마지막에는 이의방이 보낸 이의민에게 살해당했다.
의종은 인종과 임원후의 딸 공예왕후 임씨의 다섯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했고 어머니는 그보다는 둘째 아들 대령후 경을 유난히 좋아해 그를 태자로 앉히려고 했지만 정습명의 강력한 지원으로 그러지는 못했다.[3] 1143년에 태자(太子)가 되었으며[4] 정습명을 사부로 삼아 수학했다.[5]
즉위한 뒤에 그는 아버지 때에 일어난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으로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더욱이 재위 초반에는 몇몇 사람들이 다른 나라와 연계해 국가전복을 꾀하려다 사전에 들통나 처벌받는 등[6]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무신들을 등용해 친위군을 강화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 이의방, 이고, 이의민 등이 중앙 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의 재위기에는 《편년통록》, 《상정고금례》 등이 편찬되었다.[8]
1) 재위 초반에는 열병, 격구 등으로 잦은 군사 활동을 벌였다.[9]
2) '관악(觀樂)'이라는 형태로 음악 정책을 추진했는데[10] 이는 당악 요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11]
3) 유불선을 아우르는 사상 정책을 추진했다.[12]
주요 인물로는 김존중(金存中)[13], 영의(榮儀), 이복기(李復基)[14], 정함(鄭諴), 왕광취(王光就), 백자단(白子端) 등이 있다.
왕광취, 백자단 등 측근 세력의 폐단이 커지자 의종은 이들을 견제하고자 김돈중, 이공승 등 문벌 세력을 등용하고자 했으며, 이는 무신들이 의종을 향한 관심에서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김돈중의 유시(流矢) 사건으로 애먼 군인들이 처벌받자[15] 무신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의종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선택받지 못했다는 박탈심을 느꼈고, 지배 세력이 내시, 환관 등의 측근에서 문벌 귀족으로 바뀌더라도 자신들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나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이 위기의식이 결국 무신정변이라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16]
1170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에 거동했을 때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무신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음력 9월 2일 무신들에게 폐위당해 3년간 거제도의 둔덕기성에 유폐되었다.[17]
그 뒤 1173년에 김보당(金甫當) 등 의종 복위 세력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유배된 의종을 모시고 경주로 가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보낸 군대에게 모두 진압되었다.[18]
1173년, 의종은 자신이 발탁했던 장수 이의민과 곤원사(坤元寺) 연못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그가 의종을 끌어안고서는 등뼈를 꺾어버린다. 그리고 온 몸의 마디, 관절을 부러뜨려 버리고 의종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시체는 그대로 동경 (오늘날 경주)의 한 연못에 수장당하고 만다.[2]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으며 이후 아우인 명종에 의해 능이 조성되었는데 바로 희릉(禧陵)이다. 현재 희릉의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개성 동쪽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모
왕후
후궁
왕자
왕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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