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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군벌(중국어: 民國軍閥) 또는 군벌 할거 시대(중국어: 軍閥割據時期)은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군사력을 기반으로 전국 또는 지방의 일부에 웅거하면서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한 중국의 고급 군인 및 그들의 병력을 뜻한다. 군벌주의 등의 표현에서 쓰이는 사전적 의미의 군벌과 일본의 군벌 등하고는 차이가 있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0년 8월) |
중국의 군벌을 말하자면, 위안스카이 (袁世凱 원세개)의 북양군벌이 자주 거론된다. 위안스카이는 1901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북양대신 (北洋大臣)으로 임명되면서, 그 후 북양군을 형성하는 등으로 동북 삼성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북양군벌이라는 명칭은 위안스카이의 북양군에서 따 온 이름이다.
1909년에 위안스카이는 잠시 해임되어서 군권을 잃지만, 북양군은 이미 위안스카이의 심복들에 의해서 장악되어 있었다. 북양군은 1912년에 청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위안스카이의 기반이 되어 주었으나, 위안스카이가 1915년 12월에 무리하게 중화제국의 황제를 자칭하다가 극렬한 비난 속에 실각한 후, 북양군은 북양 군벌 계파별로 갈라지며 "군벌들의 전국시대"라고 할 만한 치열한 내전을 시작한다.
북양군벌은 여러 차례 심각한 내전을 벌이며, 그 와중에서도 두 차례 국공합작을 행하는 등의 유명한 여러 역사적 사건의 주체가 된다. 북양 군벌에는 계파에 따라서 직례 군벌, 안휘 군벌, 봉천 (봉계) 군벌 등의 파벌이 있었고, 이들은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여러 차례 서로 전쟁을 벌인바 있다.
위안스카이 사후 직례파와 함께 권력을 잡은 파벌이다. 주요 인물은 돤치루이(段棋瑞), 서수쟁(徐樹錚)이다. 안휘파의 지도자격인 돤치루이는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갈라질 가능성이 높아 조직력이 떨어졌고, 대부분이 군 실무직이 아닌 고위층에 위치한 탓에 실제적인 군권이 약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총통이 된 리위안훙(黎元洪)이 정치적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안휘도독 장쉰(張勳)을 1917년 베이징에 불러들였다가 장쉰이 왕정복고 쿠데타를 유발하여 완전히 힘을 잃은 뒤 정부를 장악했다. 이무렵 쑨원이 광둥에서 남부 군벌세력과 손잡고 호법군 정부를 세워 북양군벌에 대항하자 대대적인 남정을 계획하지만 직례파와의 갈등으로 무산, 봉천파를 끌어들여 직례파를 압박해 다시 한번 남정을 준비하다 역시 직례파의 무시로 좌절되었다. 결국 독자적인 군사력 확보를 위해 일본의 차관으로 참전군을 조직하지만[1] 전쟁 끝나고 조직된 탓에 엄청난 항의를 들었다. 결국 이에 불안을 느낀 직례파와의 대립으로 1920년 7월 14일 안직전쟁이 발발, 협조외교 노선을 지향하던 일본이 안휘파 대신 봉천파를 선택함에 따라 사면초가에 빠져 전쟁에서 패배한 뒤 실권을 잃었다.
안휘파와 권력을 잡은 파벌이다. 주요 인물은 펑궈장(馮國璋), 차오쿤(曹錕), 오패부(吳佩孚)이다. 안휘파와 달리 직례파는 차오쿤, 오패부 등이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이 더 강했다.
안휘파와 달리 광둥의 호법군 토벌에는 관심이 없었고, 호법군과 협상을 통해 베이징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받는 쪽에 관심이 있어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양측에 안직전쟁이 발발, 일본의 지원을 받던 안휘파를 견제하는 영국과 미국의 지지를 얻었고, 끝내 승리를 거둬 봉천파와 함께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부 진출을 노리던 봉천파 군벌 장쭤린과 갈등이 발생했고, 1922년 제1차 직봉전쟁이 발발했으나 직례파가 승리를 거두고 대세를 장악했다. 그러나 1924년 다시 힘을 기른 장쭤린의 반격으로 제2차 직봉전쟁이 발발, 예상치 못한 펑위샹의 배반으로 베이징 정부 실권을 내주게 된다.
만주를 기반으로 한 군벌이다. 다른 두 군벌과 달리 북양군이 아니라 마적단에 기반해 출발했다. 주요 인물은 장쭤린(張作霖)과 그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이다. 이들은 안휘파에 이어 일본의 지원을 받았다.
본래 마적단 출신이었던 장쭤린은 신해혁명 당시 동북지역의 혁명군을 진압하고 지역군권을 장악해 위안스카이의 황제취임 당시 위안스카이를 위협해 봉천, 길림, 흑룡강 등 동삼성 총독직을 얻었다. 그러나 장쭤린은 애초에 베이징 정부 정권 장악과 베이징 진출이 꿈이었던 사람이라 때에 따라 안휘파, 직례파 양쪽을 편들며 기회를 노렸고, 베이징 정부를 장악한 직례파와 두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여 결국 베이징을 장악했다. 그러나 직례파를 배신하고 베이징을 장악한 펑위샹(馮玉祥)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장쭤린의 부하 곽송령(郭松齡)을 끌어들여 장쭤린에 대항했고, 봉천 남부에서 새로운 군벌 손전방(孫傳芳)이 유력하게 떠올라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소련과 가까웠던 펑위샹을 염려한 일본의 개입으로 구사일생, 힘을 모아 반란을 진압하고 펑위샹 토벌에 나섰고, 장종창, 옌시산 등 다른 군벌들의 지지를 얻어 최종적으로 베이징 정부를 장악했다.
국민당의 북벌 당시 국민혁명군의 주적으로서 오패부, 손전방 등 다른 군벌들과 함께 국민당군에 맞섰으나 전세는 불리한 편이었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국민당과 협상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제남까지 진격한 국민당군을 일본군이 막아주는 사이 일본의 제안으로 장작림이 만주로 귀환하면서 베이징 지배를 포기한다. 그러나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탄 열차에서 폭탄이 터져 장작림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장학량이 장제스의 국민당과 협조하기로 하면서 국민당과의 전쟁을 끝낸다.
현 산시성에 위치했던 군벌.
현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위치했던 군벌.
광둥, 광서성에 기반한 남부군벌이다. 광둥 군벌과 광서 군벌로 구성되어 있으며 광서 군벌은 구(舊) 광서, 신(新) 광서로 나뉘어 있다. 주요 인물은 광둥성의 진형명(陣炯明), 광서성의 육영정(陸榮廷), 이종인(李宗仁)이다. 1917년 귀국한 쑨원과 협력하다가 '뒤통수 때리기'를 여러차례 반복한 이들이다. 북벌이 종료된 뒤에도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굉장히 비협조적이라 1929년 편견(編遣)회의 문제로 한차례 국지전을 벌였고, 1930년 옌시산, 펑위샹과 연합하여 중원대전을 일으켰으며, 1931년 광저우 국민정부 선언 이후에는 거의 반독립 상태였다. 1937년 또다시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국지전이 벌어질 뻔했으나 일본의 침입에 공동으로 맞서겠다는 장개석의 약조를 받은 뒤 이종인이 군을 물림으로서 전쟁위기를 넘겼다.
윈난성에 기반한 군벌이다. 주요 인물은 당계요(唐繼堯), 용운(龍雲)이다. 민국초기 위안스카이의 독재정치에 대항하여 1916년 호국 전쟁을 전개한 군벌세력이다.
1927년 용운이 당계요 권력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몰아낸 뒤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후 장제스에 대해 대체적으로 적극 협력하는 경향을 보였다.
지역적 특성 덕분에 중일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도 세력을 온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국공내전 시기에 지도자인 용운이 장제스의 압력으로 홍콩으로 피신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사천(쓰촨)성에 기반한 군벌이다. 주요 인물은 충칭의 류샹(劉湘), 청두의 류문휘(刘文辉)가 있다. 그 외에도 여러 군벌이 난립해 신해 혁명 이후 쓰촨 성은 군벌 난립시대로 인해 엄청난 혼란을 겪는다. 국민정부 시기 쓰촨성 서부지역은 티베트 동부지역과 합해 시캉 성으로 분리되었었고, 류원후이가 시캉 성 주석으로 있었다. 북벌 이후 장개석 국민혁명군에 매수되어 북벌과 통일에 협력하였지만 이후 벌어진 장계전쟁, 반장전쟁에서 류샹은 장제스에, 류원후이는 리쭝런에 협력하였다. 중원 대전에서 장제스가 승리한 이후에도 세력은 유지되었지만, 장제스 정부와 국부천대 이전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후 류원후이는 비밀리에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였고, 류샹은 중일전쟁 와중에 한커우에서 급사하였다. 항일전 승리 이후 쓰촨과 쓰촨 군은 장제스 직속 관할이 되었으나 국민당은 국공내전에서 패배한다.
신해혁명 이후 위안스카이 북양정부의 탄압을 피해 일본에 망명을 수번 반복하던 쑨원이 광저우에서 중화혁명당을 중국 국민당으로 개칭한 후, 북양 정부에 대항하여 호법 운동을 진행하였다. 광동 군벌과 협력하였지만, 쑨원이 사망하기 전까지 북벌에 대한 찬반 논쟁으로 인해 수 번의 내분을 겪었다. 이후 신생 중국공산당과 합작하는 조건으로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북벌을 추진하지만, 도중 쑨원이 간암으로 사망하였고,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장제스가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북벌 전쟁을 지휘한다. 동북 역치 이후 북벌이 표면적으로나마 완성된 이후, 국민정부의 권력 암투로 발생한 광서의 리쭝런, 서북 국민군의 펑위샹, 산시의 옌시산에 대항해 반장 전쟁이 발발하였고, 중원대전에서 승리한 장제스가 국민정부의 최고 권력을 차지한다.
중국 공산당은 1920년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1921년 상해에서 창당한 이후 1924년 국민당과 합작을 이루고 영향력을 뻗쳤다. 국민당 좌파세력 우한 국민정부와 주로 협력하지만 1927년 4월 남경에서 권력을 잡은 장개석은 국민당 내 침투한 좌익을 모두 처단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는 국공합작의 결렬이었고 제 1차 국공내전이 일어난다. 8월 1일 중국 공산당의 주은래 등의 인물의 주도로 남창봉기를 일으켰고, 이어서 모택동의 주도로 추수봉기가 농촌지역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중국공농홍군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진압으로 홍군은 주요 혁명 근거지를 옴기기 위해 정강산과 강서성 경계로 이동하고, 1931년에는 중앙 강서성 소비에트 근거지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고 중국 남부 쓰촨성, 광시성, 산시성, 광둥성, 후난성, 후베이성 등등 여러 성에 침투유격투쟁, 지구전, 소비에트 해방지구 수립을 전개하였다. 이후 1934년 중국 국민당의 대규모 초공전으로 장정을 감행한다
1916년부터 계속된 이러한 군벌들의 심각한 내전은 1928년 장제스가 북경에 진입할 때까지 계속된다. 1928년 이후 표면적인 내전은 종식되지만, 서로간의 반목과 의견차는 1950년 대, 장제스가 대만으로 이동할 때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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