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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나가마사(일본어: 黒田 長政, 1568년 12월 21일 ~ 1623년 8월 4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까지의 무장, 다이묘이다.
1568년 12월 21일 하리마국 히메지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로다 요시타카이며, 어머니는 하리마국 시카타 성의 영주 구시하시 분고노카미 고레사다(櫛橋豊後守伊定)의 딸 데루이다.[1]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 중에서 단지 히메지 성만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하리마 국 동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었고 서쪽에서는 노부나가의 정적인 아키(安芸)의 모리 데루모토가 자리잡고 있었다.[1] 요시타카는 하리마 국의 대리인으로서 노부나가에게 신종하였는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1577년 10세의 나가마사를 노부나가에게 인질로 보냈다.[1] 인질이 된 나가마사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에게 맡겨져 오미 나가하마성에서 성장하였다.[1][2] 1580년 아버지 요시타카가 셋쓰국의 아라키 무라시게의 꾀임에 넘어갔다가 내통죄로 몰려 감금당하자, 노부나가는 요시타카를 죽일 것을 명령하지만[2] 살해를 맡았던 다케나카 시게하루는 노부나가를 속이고 나가마사를 자신의 영지인 미노국 내에 숨겨주었다.[2]
나가마사는 1582년 히데요시의 편에 서서 처음으로 전투에 출진하였는데, 공을 세워 가와치국에서 첫 영지를 받았다. 다음 해에는 시즈가타케 전투, 1584년에는 네고로·사이카의 난 등에서 승리하여 영지가 2천석 증가하였고, 1587년에 있었던 규슈 공격에서는 아버지 요시타카와 함께 분고·휴가 방면을 공격하였다.[2] 그 공으로 요시타카 부자는 부젠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2] 나가마사는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였고[2], 지금의 기장군 일대에 《기장 죽성리왜성》을 축조하였다.[3][4]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토히메와 이혼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녀인 에이히메[5]를 정실로 맞아들였다.[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였고, 그 공으로 지쿠젠국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리 등 도요토미 씨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고 있다가[6] 오사카 전투에서 가토 요시아키,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과 함께 혐의를 받아 에도에 억류되었다.[6] 결국 나가마사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여러 아들들을 에도에 인질로 보내야만 했다.[6] 그 후에는 막부의 다양한 관리들과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하였는데, 혼다 마사노부, 혼다 마사즈미, 안도 나오쓰구, 도이 도시카쓰, 도도 다카토라 등과 친교를 맺었다.[6][7] 1623년 8월 4일 56세의 나이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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