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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15일부터 미얀마(버마)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9월 29일 미얀마 군정은 시위를 '진압'했다고 선언했다. 시위는 주로 제1 도시인 양곤과 제2 도시인 만달레이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사프란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이번 시위는 군부가 8월 15일 예고도 없이 천연가스 가격을 기존보다 약 5배, 휘발유/경유의 경우는 1.66~2배 인상한 조치에 반발하면서 일어났다.[1] 초기에는 일반 주민, 학생들과 반정부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일어났다.
9월 5일에는 북부에서는 파코쿠에선 승려와 군인들 간 무력 충돌이 벌어져 승려 4명이 체포됐다. 승려들은 17일까지 공식 사과와 이들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군부는 거부했고, 그리하여 9월 18일부터는 불교 승려들도 시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2]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승려들은 군인들의 사원 출입과 시주를 금하고 시민들과 함께 비폭력적으로 거리에서 행진을 벌이는 방식으로 시위하고 있다.[3] 승려들이 시위에 참여하자 일부 언론과 단체에서는 승려들이 사프란색 옷을 입는다 하여 사프란 혁명(Saffron Revolution)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4][5]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미얀마에서 승려들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다. 그리고 승려들은 사회적 영향력이 상당히 강력하다.
군부는 9월 6일 0시를 기해 옛 수도인 양곤과 만달레이에 60일간 오후 9시부터 이튿날 오전 5시까지 야간 통행 엄금을 발령했고 5명 이상의 집회도 엄금했다.[6]
9월 22일에는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승려와 시위대 2000여명이 아웅 산 수 치의 자택을 방문하자 수 치가 현관에 나와 이들을 환영했다. 수 치는 약 15분간 모습을 보였으며 시위대에게 손을 흔들고 눈물까지 훔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26일에도 시위대가 수 치의 자택을 방문하려 했지만 군경은 바리케이드로 길목을 차단했다. 인세인 교도소로 이감되었다는 투옥설도 있으나 당국에서는 아직 가택 연금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아웅 산 수 치가 이끌고 있는 민족민주동맹 인사가 경찰에 연행됐다.[7]
대학생들도 시험을 거부하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군이 사원에 들어가 승려들에게 총과 수류탄 등을 동원하며 연행하자, 승려들은 군의 사원 점거에 맞서 창과 칼을 들었다.[8]
하지만 군부의 강경적인 진압으로 인해 9월 29일부터는 시위가 잠잠해진 것으로 알려졌다.[9] 한편, 이브라힘 감바리 유엔 특사의 미얀마 방문에 맞춰 현 군부를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 것으로 전해졌다.[10]
10월 1일부터는 주민들이 군부 지도자들의 소식을 전하는 시간대인 오후 8시부터 15분간 TV를 끄고 소등하는 '침묵 시위'를 벌이고 있다.[11]
버마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는 평화적으로 진행됐으나 군인과 경찰이 총으로 경고 사격과 함께 최루탄과 공포탄을 동원하고, 곤봉으로 시민을 때리며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군부는 또한 승려들이 정치 참여로 사회 평화와 불교 교리를 위반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불교 사원에 들어가 불교 승려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쏘며 연행하였으며[12] 승려들의 외출도 통제한 것으로 알려졌다.[13]
야간통행엄금과 집회엄금령을 무릅쓰고 승려들이 주도한 반정부 시위에서 군인과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승려와 시민들이 총에 맞거나 경찰봉에 구타당해 기절하거나 부상당하고 연행당했다. 9월 27일 새벽에는 군이 불교 사원 두 곳에 실탄을 발사하며 급습해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승려 100여 명을 체포한 것으로 알려졌다.[14] 또한 체포된 일부 승려들은 양곤 시내의 한 기술대학 및 사용하지 않는 경마시설에 구금된 것으로 알려졌다.[15]
또한 같은 날 일본인 사진기자인 나가이 겐지(長井健司)기자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나가이 겐지 기자는 AFP 통신의 계약 사진기자로, 그는 최후까지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16] 한편, 일본인 사진기자에게 의도적으로 총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7] 그러자 얀 윈 미얀마 외무장관이 뉴욕 유엔 본부에서 고무라 마사히코 일본 외상과 가진 회담에서 "나가이 겐지의 사망은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한 것으로 알려졌다.[18]
한편, 9월 26일 야당 당원이 조사를 받다 숨진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19]
아직까지 사상자 수는 각 언론사들이 낸 통계와 미얀마 군부가 발표한 통계가 모두 제각각 달라 정확한 사상자 수가 나오지 않고 있다. 미얀마 군부의 발표에 따르면 모두 13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고 밝혔다.[20] 하지만 군부가 발표한 사망자 수보다 실제 사망자가 더 많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21]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지는 미얀마 언론인의 주장을 인용, 군과 경찰이 달아나는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으며 최소한 4명의 젊은이가 등에 총격을 받아 즉사했다고 보도하였다.[22] 또한 미국의 반(反) 군부독재단체인 '버마를 위한 미국운동'은 미얀마 군부의 사흘간의 유혈 민주화운동 진압으로 시위 참가자 약 200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지는 못했다.[22]
시위 상황을 중계한 인터넷 웹사이트와 블로그를 차단하고 인터넷 접속은 물론, 시위를 이끈 승려들의 사원과 야당 정치인, 대학생 지도부의 유, 무선 전화뿐만 아니라 미얀마 내 국내외 기자들의 전화선도 모두 두절됐으나 유튜브와 현지 네티즌 등이 개설한 블로그 등에 휴대전화, 디지털 카메라 등으로 촬영한 관련 동영상과 사진들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8][12]
한편, 코글로뉴스의 정범래가 미얀마의 시위를 취재한 것이 군부에게 적발돼 수배령이 떨어지기도 하였으나, 9월 26일 늦은 오후 항공기를 통해 타이로 피신했다.[23]
9월 29일에는 미얀마 경찰 당국의 대표라고 소개한 한 남성이 반정부 시위를 취재 중인 스웨덴과 덴마크 기자들에게 신변 안전을 위해 미얀마에서 철수하라는 내용의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24]
유엔은 이브라힘 감바리 특사를 미얀마에 파견했다. 특사는 9월 29일 미얀마에 도착해 행정수도인 네피도에서 미얀마 군부 지도자들을 만나고 다음으로 반정부 인사인 아웅 산 수 치 등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35] 10월 2일에는 네피도에서 군부의 최고 권력자인 탄 슈웨 장군을 만나고, 아웅 산 수 치와 2차 면담을 가졌다.[46]
통행금지는 2007년 11월 해제되어 평온을 되찾고 있으며, 지난 10월까지 차단됐던 전화도 이제는 허용되고 있다.[47] 미얀마 국적 항공사인 '미얀마 에어웨이즈 인터내셔널'은 시위로 중단된 국제노선 운항을 2008년 1월 4일부터 재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48] 미얀마 군사정권은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2008년 5월 12일과 24일(사이클론으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에 한해 24일로 연기) 두 차례에 걸쳐 실시했다. 이 헌법 개정안에는 외국인과 결혼했거나, 군 출신이 아닌 사람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얀마 군부의 뜻대로 헌법이 개정되면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로 10년이 넘게 가택연금 상태인 아웅 산 수 치 여사의 대통령 선거 출마가 불가능해진다. 결국 이 헌법에 의해 치러질 2010년 미얀마 대통령 선거에 아웅 산 수 치 여사가 출마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군사 정권의 지속적인 유지가 헌법 개정의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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