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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韓堡[1], 1447년 ~ 1522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무신 겸 문신이다.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장보(障父)이다. 음보로 출사하여 무신으로 입신한 문신이며, 무과 급제 후 예종 때 낭성군(琅城君)에 봉군되고, 성종 즉위후에는 좌리공신 4등관에 녹훈된 뒤 자헌대부에 이르렀다. 한명회의 적장자이며 성종은 그의 매제이자, 성종의 딸 공신옹주가 한보의 며느리였으므로 성종과 사돈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영의정 상당부원군 한명회이며,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된 민대생(閔大生)의 딸이다. 한보는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의 동생이자, 성종원비 공혜왕후의 오빠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하였다. 그 뒤 한산 이씨 이훈의 딸과 결혼하였다.
1460년(세조 6년) 13세에 음보로 출사하여 용양위수사정(龍驤衛守司正)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승진하여 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이 되고, 1462년(세조 8년) 세자익위사우사어(世子翊衛司右司禦)·사섬시소윤(司贍寺少尹)에 이르렀다.
1463년 통례원사(通禮院事), 1465년 의흥위섭호군 겸 통례문판사(義興衛攝護軍兼通禮門判事), 1466년 1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한 뒤 한성부에서 무예를 단련하다 1469년(예종 1년) 낭성군(琅城君)에 봉군되었다.
아버지 한명회가 성종의 즉위를 지지하였고 그 공로로 한보 역시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관에 책록되어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72년 가정대부 한성부우윤, 1475년 공조참의 겸 도총관이 되고, 이듬해 자헌대부 낭성군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양모(養母) 조씨(曺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때 양모 조씨에게 불효하였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476년 행 부사직(副司直)으로 복직되었고, 1478년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였다. 1492년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갑자사화에 연루되었으나 처형은 모면하였다.
1515년 치사(致仕)하기를 간청하여 관작을 사퇴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성종 때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여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는 간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조롱을 당하였다. 그는 공신의 아들이면서도 스스로 처신을 삼갔을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몸을 삼갈 것을 경계하였다.
그는 한성부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에 거주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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