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효자동(淸雲孝子洞)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의 행정동이다. 청운동과 효자동의 이름을 따서 2008년 11월 1일 청운효자동으로 되었으며, 법정동은 세종로, 청운동, 효자동, 신교동, 궁정동, 옥인동, 통인동, 창성동, 누상동, 누하동이 있다.
간략 정보 청운효자동 淸雲孝子洞, 로마자 표기 ...
청운효자동 淸雲孝子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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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효자동주민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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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Cheongunhyoja-d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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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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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서울특별시 종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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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 22통, 152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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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동 | 청운동, 신교동, 궁정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누상동, 누하동, 옥인동, 세종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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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 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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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2.57 km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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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1,766명(2022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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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 5,234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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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밀도 | 4,580명/km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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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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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유래
청운효자동의 ‘청운’이란 이름은 청운초등학교 뒤쪽의 청풍계(淸風溪)라는 계곡이 있는 마을의 ‘청’자와 백운동(白雲洞)이라는 마을의 ‘운’자를 따서 지었다. 청풍계와 백운동은 인왕산의 맑은 바람, 맑은 물과 함께 흰 구름으로 덮여 있는 자연환경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북부 백운동·청풍동·박정동(朴井洞)·신교(新橋)의 각 일부를 합쳐 ‘청운동’(淸雲洞)이라고 하였고, 1936년 일제가 청운정으로 바꾸었다.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종래의 행정구역을 우리말로 개칭하여 다시 청운동이 되었다. ‘효자’란 이름은 선조 때 학자 조원(趙瑗)의 아들 희신과 희철 형제라는 효자가 났다고 하여 쌍효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효곡(孝谷)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효자동이라 하였다.[1]
연혁
-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아래와 같이 개편함[2]
- 청운동(淸雲洞) ← 백운동(白雲洞) · 청풍동(淸風洞) · 박정동일부(朴井洞一部) · 신교일부(新橋一部)
- 신교동(新橋洞) ← 신교일부(新橋一部)
- 궁정동(宮井洞) ← 육상궁동일부(毓祥宮洞一部) · 동곡일부(東谷一部) · 온정동일부(溫井洞一部) · 신교일부(新橋一部) · 박정동일부(朴井洞一部)
- 효자동(孝子洞) ← 백구동일부(白狗洞一部) · 동곡일부(東谷一部) · 육상궁동일부(毓祥宮洞一部) · 장동일부(壯洞一部) · 효곡(孝谷) · 온정동일부(溫井洞一部) · 신교일부(新橋一部)
- 창성동(昌成洞) ← 옥정동(玉井洞) · 대동일부(帶洞一部) · 간곡(間谷) · 창성동(昌成洞) · 장동일부(壯洞一部) · 백구동일부(白狗洞一部)
- 통동(通洞) ← 통곡(通谷) · 사포동(司圃洞) · 옥동일부(玉洞一部)
- 누상동(樓上洞) ← 누각동일부(樓閣洞一部)
- 누하동(樓下洞) ← 오거리(五巨里) · 남척동(南隻洞) · 송목동(松木洞) · 장성동(長城洞) · 유목동(柳木洞) · 복정동(福井洞) · 누각동일부(樓閣洞一部)
- 옥인동(玉仁洞) ← 옥동일부(玉洞一部) · 인왕동(仁王洞)
- 1936년 4월 1일: 동(洞)을 정(町)으로 변경, 통동을 통인정으로 개칭[3]
- 1943년 6월 10일: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에 배속[4]
- 1946년 10월 1일: 정(町)을 동(洞)으로 변경[5]
- 1955년 4월 18일: 아래와 같이 행정동 설치[6]
- 자하동(紫霞洞): 청운동 · 신교동 · 궁정동 · 세종로 1번지
- 청송동(廳松洞): 효자동 · 창성동
- 누각동(樓閣洞): 누상동 · 누하동
- 인왕동(仁王洞): 옥인동 · 통인동
- 1970년 5월 18일: 행정동 자하동을 청운동으로, 누각동을 누상누하동으로, 인왕동을 옥인동으로 개칭하고, 청송동과 백송동을 효자동으로 합동[7]
- 1975년 10월 1일: 행정동 옥인동과 누상누하동을 누상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과 효자동 일부(통인동)로 개편[8]
- 1977년 9월 1일: 행정동 누상동과 효자동을 효자동(효자동+창성동+통인동+누상동+누하동+옥인동)과 사직동 일부(통의동+적선동)로 개편[9]
- 2008년 11월 1일: 행정동 청운동과 효자동을 청운효자동으로 합동[10]
- 청운동
- 창의문(彰義門): 한양도성의 4소문 가운데 북서쪽 문이다. 4소문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
- 정철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 송강 정철의 집터이다. 청운동 123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청운초등학교 앞에 표지석이 있다.
- 김상헌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 김상헌의 집터이다. 청운동 94-2번지에 위치하였다.
- 정선 생가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집터로,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여기서 그려졌다. 52세까지 거주하였다.[11]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표지석이 있다.
- 백운장(白雲莊) 터: 조선 말기의 문신 김가진의 집터에 1915년 일본인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지은 요정으로, 개업 당시 명칭은 청향원(淸香園)이었으나 192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 1962년 9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서 이 일대를 구입하여 지금은 포교원이 들어섰다.
- 운강대(雲江臺) 터: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趙瑗)의 집터이다.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
- 청송당(聽松堂) 터: 조선 초기의 문신 성수침의 집터이다. 청운동 89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
- 백세청풍(百世淸風)·대명일월(大明日月) 각자: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지며, 청운동 52-58번지에 위치한다. ‘대명일월’ 각자는 현재 소실되었다.
- 백운동천(白雲洞天) 각자: 김가진이 새긴 글씨로, 서울시 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 무릉폭(武陵瀑)·도화동천(桃花洞天) 각자: 청운동 1-1번지에 위치한다.
- 신교동
- 선희궁(宣禧宮) 터: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사묘인 선희궁이 위치하던 터로, 선희궁은 1908년에 현재의 칠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신교동 1-1번지에 위치한다.
- 후천(后泉)·감류천(甘流泉) 각자: ‘후천’ 각자는 ‘선희궁 뒤편의 샘’ 또는 ‘왕후의 샘’이라는 뜻으로 추정된다. ‘감류천’ 각자는 선희궁 뒤 산기슭에서 흘러나오던 샘물의 이름으로 보인다.
- 궁정동·세종로
조선의 정궁으로 태조 이성계가 지어 임진왜란때 불탄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240여동의 건물이 훼손되거나 경매되었다. 현재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실시하는 중이다. 세종대로에 위치한다.
- 칠궁: 조선의 후궁 7인의 신위를 모신 곳으로, 궁정동 1-1번지에 위치한다. 육상궁,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이다. 이 중 육상궁(毓祥宮)은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를 모신 곳으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 청와대 안가 터: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기도 하였던 안가가 위치하던 곳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개장하였으며, 궁정동 55-3번지에 소재한다.
- 김번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 김번의 집터로, 궁정동 2번지에 위치하였다.
- 김수항 집터: 조선 중기의 문신 김수항의 집터로, 궁정동 2번지에 위치하였다.
- 낙송루(洛誦樓)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흡이 1682년 지은 건물이 있던 터로, 현재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였다.[17]
- 악록유거(岳麓幽居)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흡의 집터로, 현재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였다.
- 양정재(養正齋) 터: 숙종의 셋째 왕비 인원왕후가 탄생한 곳으로, 현재의 청와대 영빈관 일대로 추정된다.
- 취록헌(翠麓軒) 터: 조선 중기의 시인 이병연의 집터로, 현재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였다.
- 백악신사(白嶽神祠) 터: 1395년에 백악산신(白岳山神)을 모신 사당을 현 북악산의 정상부에 설치하였다.
- 독락정(獨樂亭)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홍이 지은 누정으로, 《장동팔경첩》에도 그려진 바 있다.
- 대은암(大隱岩)
- 세심대(洗心臺)
- 악록(岳麓)·쌍계동(雙溪洞)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하며, 하나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악록’ 각자는 조선 중기의 문신 김창흡의 집터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17]
- 명옥천(鳴玉泉)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한다.
- 성암(醒巖) 각자: 청와대 내부에 위치한다.
- 이쾌대 집터: 화가 이쾌대가 1939년 초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정착한 한옥으로, 궁정동 16-3번지에 위치하였는데, 1990년대 초 도로 개설로 철거되었다.[21]
- 효자동
- 쌍홍문(雙紅門) 터: 효성이 지극한 조원을 기려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던 터이다. 효자동이라는 동명의 유래가 되었다.
- 신익희 가옥: 신익희가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 숨질 때까지 살았던 집으로, 효자동 164-2번지에 소재한다. 서울시 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 창성동
- 사재감(司宰監) 터: 왕실의 어류, 육류, 소금, 땔나무, 횃불 등의 일을 맡던 기관으로, 창성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 체신관리양성소(遞信管理養成所) 터: 일제강점기에 통신 요원을 양성하던 기관으로, 창성동 117번지에 위치하였다.
- 진명여자고등학교 터: 고종 황제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재산을 기반으로 엄준원이 세운 학교로, 창성동 67번지에서 1989년 목동으로 이전하였다.
- 통인동
- 세종대왕 탄생지: 통인동 119번지 일대로 추정된다.
- 이상 가옥: 통인동 154번지에 위치하였으며, 1933년에 매각되어 현재는 여러 필지로 분할되었다.[23]
- 내시부(內侍府) 터: 왕실의 식사 감독, 왕명 전달, 궐문 수문(守門)과 수직(守直), 청소 등을 맡던 기관으로, 통인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 사포서(司圃署) 터: 왕실의 채소와 밭을 관리하던 기관으로, 이후 수송동 116번지로 이전하였다.
- 누상동
- 백호정(白虎亭) 터: 조선 시대 한양의 다섯 활터 가운데 하나로, 지금은 각자만이 누상동 27-12번지에 남아있다.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59호로 지정되었다.
- 윤동주 하숙집 터: 태평양 전쟁의 영향으로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져 윤동주는 1941년 5월 김송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하였다.[23] 누상동 9번지에 있었던 집은 2000년 전후에 헐려 현재 3층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다.
- 누하동
- 노천명 가옥: 누하동 225-1번지에 위치한다.
- 이상범 가옥: 등록문화재 제171호로 지정되었으며, 누하동 178·181번지에 있다.
- 옥인동
- 자수궁 터: 광해군이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지었던 궁궐로, 옥인동 45-1번지에 위치하였다.
- 수성동 계곡: 옥류동천의 상류로, 서울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 육청헌(六靑軒)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항의 집으로, 1683년에 지었다. 옥인동 47-73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
- 청휘각(淸暉閣) 터: 육청헌 마당에 있던 누각으로, 1686년에 지었다. 청휘각을 짓고 30년 가량이 지나자 기울어져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업이 새로 지었고, 이후 김수근·김병국·김병교·김학진이 차례로 물려받았다가 민규호에게 넘어갔다.[29]
- 가재우물(稼齋-) 터: 청휘각 뒤에 있던 우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가재 김창업이 그 물을 마셨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9] 옥인동 47-376번지에 소재하나, 콘크리트에 뒤덮인 상태이다.
- 송석원(松石園) 터: 조선 후기의 시인 천수경이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지은 집으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결성되어 일대의 여러 여항시인들이 참여하였다.
- 벽수산장(碧樹山莊) 터: 윤덕영이 1910년 12월에 송석원 터를 사들여 1937년 준공한 대저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만 해도 ‘송석원’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벽수산장으로 이름이 변하였다. 1966년 4월 5일 전소되었고, 1973년 6월 철거되었다. 지금도 옥인동 47-27, 47-33번지에 대문 기둥 가운데 3개가 남아 있다.
- 박노수 가옥: 윤덕영이 지어 해방 이후 박노수가 거주하던 곳으로,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옥인동 168-2번지에 위치한다.
- 옥인동 서용택 가(玉仁洞 徐龍澤 家): 옥인동 47-133번지에 소재하는 한옥으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으나 해제되었다.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이었다.
- 이이엄(而已广) 터: 조선 후기의 문인 장혼(張混)의 집터로, 옥인동 일대에 위치하였다.
- 인곡유거(仁谷幽居)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이 52세부터 생을 마감하던 84세까지 살던 집으로, 옥인동 20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11]
- 북학(北學) 터: 옥인동 45번지에 위치하였다.
- 이여성 집터: 옥인동 56번지에 있던 이쾌대의 형 이여성의 집터로, 1938년에 이사를 온 2층 양옥이다.[21] 1940년대 초, 이화여전 학생들이 이여성의 고증으로 재현된 삼국의 옷을 입고 패션쇼를 한 곳이 이곳 2층 베란다였다.
- 옥류동(玉流洞) 각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전해지는 각자로, 1950년대에 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가 2019년에 다시 발견되었다.[34] 옥인동 47-360번지(필운대로9가길 44-5)에 있다.
구조례 제740호 동주민센터명칭과소재지및관할구역에관한조례 (2008년 9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