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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요시다 내각(일본어: 第5次吉田内閣)은 요시다 시게루가 제51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어, 1953년 5월 21일부터 1954년 12월 10일까지 존재한 일본의 내각이다.
1953년 2월 28일에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중의원 예산 위원회에 대한 실언(이른바 ‘바보 발언’)을 계기로 같은해 3월 14일 중의원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상정되어 요시다 총리는 즉시 중의원을 해산했다(일명 바카야로 해산). 같은해 4월 19일에 실시된 제2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은 제1당의 자리를 확보했지만 과반수가 34의석을 밑도는 199의석으로 끝났다.
그러나 요시다가 이끄는 자유당은 하토야마의 자유당, 개진당, 우파 사회당, 좌파 사회당 등 야당 4당파의 보조를 맞추어 혼란을 교묘하게 붙고 오아사 다다오 등 개진당 보수 연계파를 확보해 나가며 내각총리대신 지명투표를 결선투표에 가져오면서 이를 그대로 실현시켰다. 요시다는 시게미쓰 마모루 개진당 총재와의 당수 회담을 가지면서 개진당을 각외 협력에 경사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해인 5월 20일에 내각이 조성됐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 인증식을 거쳐 성립한 것이 ‘제5차 요시다 내각’이다. 이 내각은 소수 여당 정권이었지만 사실상 각외 협력에 자세를 취하는 개진당, 같은 보수 성향인 하토야마 자유당의 협력을 얻어 파업 규제법안, 공제연금법안 등 1953년도의 예산을 성립시켰다.
이듬해 1954년에는 보전 경제회 사건을 계기로 조선 의옥이 부상했다. 검찰청은 일련의 수사 과정에서 정부에 대해 뇌물수수죄의 혐의를 내보이고 여당인 자유당 간사장 사토 에이사쿠의 체포 허용 청구 수속을 맡아달라고 요구했다. 이 움직임에 대해 요시다 총리는 이누카이 다케루 법무대신에게 검찰청법 14조에 근거하는 지휘권 발동을 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이누카이 법무대신은 같은 해 4월 21일, 사토 도스케 검사총장에게 사토 간사장의 체포를 중단하고 임의 수사 및 재택 기소로 전환하도록 지휘했다. 법무대신에 의한 검사총장에의 지휘권 발동은 이것이 전후 최초의 사례이며 표면화한 형사사건의 수사에 정치적 압력이 더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 지휘권 발동에 대한 여론과 야당의 반발은 격화되면서 다음날에 이누카이는 법무대신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후 법무대신에 의한 지휘권 발동은 이뤄지지 않았다.
1954년 9월 26일, 조선의옥에 의한 정국 불안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요시다 총리는 캐나다,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바티칸, 영국, 미국 등의 7개국을 순방하러 나갔다. 그 전에 미키 부키치의 운동에 의한 반(反)요시다파가 결집하면서 하토야마 이치로를 총재로 하는 일본민주당이 결성됐다. 야당은 요시다 내각의 불신임안을 제출하는 움직임이 나오자 요시다는 시종 강경한 자세를 보였지만 오가타 다케토라, 마쓰노 쓰루헤이, 그리고 간사장인 이케다 하야토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내각은 총사직했다.
1953년 5월 25일 임명.
일본의 역대 내각 | ||
전임 내각 제4차 요시다 내각 |
제5차 요시다 내각 1953년 5월 21일 ~ 1954년 12월 10일 |
후임 내각 제1차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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