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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미쓰 마모루(일본어: 重光 葵, 1887년 7월 29일~1957년 1월 26일)는 일본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로 세 번 외무대신을 맡았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로 USS 미주리에 올라 항복 문서에 서명하였다.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3년 12월) |
시게미쓰 마모루 重光 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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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외무대신 | |
임기 | 1954년 12월 10일~1956년 12월 23일 |
전임 | 오카자키 가쓰오 |
후임 | 기시 노부스케 |
총리 | 하토야마 이치로 |
임기 | 1945년 8월 17일~1945년 9월 15일 |
전임 | 도고 시게노리 |
후임 | 요시다 시게루 |
총리 |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
임기 | 1943년 4월 20일~1945년 4월 7일 |
전임 | 다니 마사유키 |
후임 | 스즈키 간타로 |
총리 |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87년 7월 29일 |
출생지 | 일본 제국 오이타현 분고오노시 |
사망일 | 1957년 1월 26일 | (69세)
사망지 | 일본 가나가와현 유가와라정 |
학력 | 도쿄제국대학 |
시게미쓰 마모루는 1887년 7월 29일 오이타현, 오늘날의 분고오노시 지역에서 태어났다. 1911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외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1]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영국, 미국 등을 오가며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30년 주중화민국 공사가 되었다.
시게미쓰는 만주사변 때 만주에서의 일본군의 움직임에 대한 유럽 각국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에는 유럽 국가들이 일본군과 중화민국군 간 정전 중재에 나서도록 노력했다. 상하이 사변 당해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쇼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투척한 폭탄에 부상당해 오른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하게 되었다.
시게미쓰는 주소련 대사로 1938년 하산호 전투 후 협상을 맡았고, 이후 주영국 대사를 지냈으나 1941년 6월 소환되었다. 같은해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에 왕징웨이의 중화민국 국민정부 대사로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 4월 20일 도조 히데키는 시게미쓰를 외무대신에 임명했다. 1944년 7월부터는 대동아장관을 겸했다. 1945년 일본 제국의 항복 선언 직후에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내각이 외무대신으로 임명했으며, 9월 2일 일본 제국의 전권 대사로서 우메즈 요시지로와 함께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조인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며,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금고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50년 11월 21일 가석방되었다.
개진당(改進党)의 총재가 되어 1952년 10월 일본 중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본민주당 부총재를 지내고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에서 부총리 겸 외무대신에 임명되었으며, 1955년 4월 반둥 회의에서 일본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이는 국제연맹에서 탈퇴한 이래 일본의 첫 국제 회의 참가였다. 같은해 8월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다.[2] 1956년 7월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와 쿠릴 열도 분쟁 해결, 국제연합 가입 등을 논의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일본은 일소공동선언 등을 거쳐 이해 12월 18일 국제연합에 80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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