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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 (1896–1987)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기시 노부스케(일본어: 岸信介, 1896년 11월 13일 ~ 1987년 8월 7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농상무성장관,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으며, 일본의 정2위국화장을 받았다. 쇼와의 요괴(昭和の妖怪)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성씨는 사토(佐藤)이다.
1936년에 만주국 정부의 산업부 차관이 되어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40년 귀국하여 1941년 도조 내각의 상공대신 및 군수성 차관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전후 극동 국제 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3년 반 투옥 되던 중에 1950년 한국 전쟁 및 냉전이 시작됨으로 인해, 미국의 정책은 전범국 일본 권력 해체에서 다시금 일본 권력을 적극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책 방침이 변경되어 결국 기시는 기사회생 하게 되었다. 1957년 총리가 되었으나 1960년 미일안보조약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 시위 등 혼란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896년 11월 13일에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하였고,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대학을 졸업한 직후 농상무성에 들어갔는데 1925년 농상무성이 상공성과 농림성이 분할 되면서 상공성에 배속되어 1933년 2월에 상공대신관방 문서 과장, 1935년 4월에는 상공성 공무 국장으로 취임하고 1936년 10월부터는 만주국 정부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하여 만주국「산업 개발5개년 계획」을 실시하였다. 친동생은 사토 에이사쿠이다.
그는 사업가로 재기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1953년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당내 헌법조사회 회장이 되었는데 1954년에는 하토야마 이치로 등과 함께 자유당에서 제명되자 일본 민주당을 결성하였고, 민주당이 1955년에 자유당과 통합하여 자유민주당(자민당)을 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1955년 자유민주당 간사장이 되고, 이듬해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시 단잔에게 패하고 이시바시 내각의 외무상으로 취임, 이시바시가 병으로 물러나자 1957년 2월에 총리가 되었다. 1960년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되찾기 위해, 미국, 한국 등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냉전에 일부 가담하는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1]을 추진, 국회 비준을 강행하여 이에 반대하는 일본 기독교계와 민중들의 대규모 군중시위(안보투쟁)를 불러일으키면서 국민의 비난을 받고 총리직을 물러났다.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자민당에서 계속 활발히 활동했다.
1966년과 1972년 민간 외교 차원에서 한국을 찾은 것을 비롯하여,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을 방문하였다. 그 후 1979년 정계에서 은퇴하고 1981년 곡물소에서 일했으며, 1987년 8월 7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총리가 된 후 그는 외교 관계에 많은 신경을 썼다. 미·일관계, 동남아시아 및 남아시아 국가들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957년에는 이들 나라를 방문해 배상협정과 경제협력을 추진했다. 1959년 서유럽, 라틴아메리카 순방에 이어 1960년 1월 미국으로 가서 미·일관계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독자적인 외교권을 위해 미·일 안보조약 개정안을 조인했다. 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전쟁을 금지하여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었던 전후 일본 평화헌법을 공식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하는 한편 일본의 자주국방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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