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식(八識, 산스크리트어: aṣṭavijñāna, astau vijñānāni, 영어: Eight Consciousnesses) 또는 8식신(八識身)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에서 마음(즉 심왕, 즉 심법)을 구성하고 있다고 보는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의 8가지의 식(識)을 말한다.[1][2] 8식은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5위, 즉 심법(心法: 8가지) · 심소법(心所法: 51가지) · 색법(色法: 11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 · 무위법(無爲法: 6가지)의 5가지의 그룹들[五位] 가운데 첫 번째 그룹인 심법을 이룬다.[2]
마음(즉 심왕, 즉 심법)이 8식으로 나뉜다는 견해는, 8식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8식에 암마라식(菴摩羅識) 또는 무구식(無垢識)을 더한 9식(九識)을 세우는 등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 8식을 받아들인다는 면에서 보면,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뿐만 아니라 화엄종 · 천태종 · 선종 등 대승불교 전반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견해이다.[3] 이에 대해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상좌부불교 등에서는 마음이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가지 식(識), 즉 6식(六識)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4][5]
그리고 부파불교에서는 마음(즉 심왕, 즉 심법)은 본래 1가지로 단일한 것이지만 그 발동 근거인 6경과 6근에 따라 나뉜다고 본다. 즉 마음의 체(體)가 하나라고 본다.[5] 이에 비해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는 마음 즉 8식의 체가 하나라는 식체일설(識體一說)의 견해와 8식 각각에는 별도의 체가 있다는 식체별설(識體別說)의 견해가 있다. 전자의 식체일설은 안혜 계통의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의 견해이고, 후자의 식체별설은 호법 계통의 유상유식파(有相唯識派)와 중국의 법상종의 견해이다.[6]
용어
전5식·후3식
8식 중에서의 앞의 5가지 식, 즉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을 전5식(前五識) 또는 5식(五識)이라 하며, 뒤의 3가지 식, 즉 의식 · 말나식 · 아뢰야식을 후3식(後三識)이라 한다.[7][8] 전5식은 색(물질)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識)으로, 그 인식대상들을 각각 색경(색깔, 모양, 크기) · 성경(소리) · 향경(냄새) · 미경(맛) · 촉경(감촉)이라 하며 이들을 5경(五境)이라 한다.[7][8] 후3식 중 의식(意識)은 5경(五境)에 법경(法境)을 더한 6경(六境)을 인식대상으로 하는 식으로 제6의식이라고도 불리는데,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에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며, 다시 말나식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을 근거하여 생겨나는 식이다.[2][9][10][11]
전6식
8식 중 말나식과 아뢰야식을 제외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을 전6식(前六識)이라고도 한다.
7전식·전식·전7식
유식유가행파와 법상종 등 대승불교에서는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 · 말나식의 7식(七識) 즉 7가지의 식은 모두 제8식인 아뢰야식으로부터 생긴 것 또는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통칭하여 7전식(七轉識) 또는 전식(轉識)이라 부른다.[2][11][12] 또한 이들 7가지 식들을 전7식(前七識)이라고도 한다.
한편, 미륵 → 무착 → 세친 → 덕혜(德慧, Gunamati: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 안혜(安慧, Sthiramati: 475~555 또는 510~570) → 진제(眞諦: 499~569)의 섭론종으로 이어진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13]의 논서들에서 전식(轉識)은 제7 말나식을 제외한 전6식(前六識)만을 의미한다.[12][14][15]
식의 명명법
8식 중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은 모두 각자의 소의근(所依根), 즉 안근(眼根) · 이근(耳根) · 비근(鼻根) · 설근(舌根) · 신근(身根) · 의근(意根)을 따라 그 이름이 세워진 식(識)들이다. 달리 말하면, 본래 1가지로 단일한 마음(즉 심왕, 즉 심법)을 구분할 때 소의근에 따라 6가지 식(識)으로 구분한 것이다.[2]
8식 중 말나식(末那識)과 아뢰야식(阿賴耶識)은 그 본질적 성질 즉 자성(自性)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식(識)들이다.[2] 말나식(末那識)의 본질적 성질은 언제나 심세하게 생각하는 것[恆審思量]으로, 이것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사량(思量) 또는 의(意)라고 하며, 이 두 낱말은 모두 산스크리트어 마나스(manas)를 의역한 것이며 마나스를 음역하여 말나(末那) 또는 말나식(末那識)이라 한다.[2][16] 아뢰야식(阿賴耶識)의 본질적 성질은 인과의 종자를 함장하고 인연에 따라 그 종자를 현행 상태로 일으키는 것으로, 이것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집기(集起: 쌓고 일으킴) 또는 심(心)이라고 하며, 이 두 낱말은 모두 산스크리트어 치타(citta)를 의역한 것이며, 이러한 성질을 가진 식을 아뢰야(阿賴耶) 또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 한다.[2][17][18]
전5식과 의식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을 전5식(前五識)이라고 하며, 의식(意識)을 제6식(第六識), 제6 의식(第六意識) 또는 제6의식(第六意識)이라고도 한다.[19][20][21]
대승불교의 8식 중 앞의 6식의 경우, 즉, 전5식과 의식(즉, 제6의식)의 경우, 이들 6식이 아뢰야식과 말나식을 근거로 하여 전개된다고 대승불교에서는 주장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비록 이 차이가 사상적인 면에서 아주 커다란 차이이기는 하지만, 이들 6식의 성질과 작용에 대한 대승불교의 견해는 부파불교의 6식에 대한 견해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자성분별·계탁분별·수념분별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에 따르면, 전5식(前五識)은 심(尋)과 사(伺)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감성적 인식(感性的認識)이며, 감성적 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인식대상의 자성(自性: 본질적 성질, 예를 들어, 빨간색의 경우 빨간색 그 자체 또는 노란색의 경우 노란색 그 자체)을 분별(지각)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자성분별(自性分別)이라고 한다.[22] 여기서, 심(尋)의 마음작용은 거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으로 이 작용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심구(尋求: 찾고 탐구함)라고 한다. 그리고 사(伺)의 마음작용은 정밀한 살펴봄의 마음작용 즉 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으로 이 작용을 전통적인 용어로는 사찰(伺察: 정밀하게 살펴봄)이라 한다.[23][24][25]
이에 대해, 의식(意識), 즉 제6의식(第六意識)은 혜(慧: 판단)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오성적 인식(悟性的認識)이며 또한 염(念: 기억)의 마음작용을 본질로 하는 기억(記憶) 또는 재인식(再認識)이다. 오성적 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헤아리고 판단하여[計度] 분별한다'라는 뜻에서 계탁분별(計度分別)이라 하며, 기억 또는 재인식을 전통적 용어로 '기억[念] 또는 재인식[念]을 바탕으로 분별한다'라는 뜻에서 수념분별(隨念分別)이라 한다.[22]
무분별·유분별
전5식은 감성적 인식일 뿐이기 때문에 완전한 인식이라고 할 수 없으며 또한 혜(慧: 판단)의 작용은 없고 심(尋)과 사(伺)의 작용만 있기 때문에 대상에 대한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이다. 불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전통적인 용어로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없다'는 뜻에서 무분별(無分別)이라 한다. 여기에 의식 즉 제6의식의 오성적 인식과 기억 또는 재인식이 더해짐으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비로소 대상에 대해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가지게 된다. 확정적인 인식 또는 앎을 전통적인 용어로 '[확정적인] 분별, 식별, 요별 또는 앎이 있다'는 뜻에서 유분별(有分別)이라 한다.[22] 한편, 전5식의 본질적 성질로서의 무분별(無分別: 불확정적인 인식)은 반야바라밀다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므로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설일체유부의 논사인 제바설마(提婆設摩)는 《아비달마식신족론》에서 무분별(無分別) 즉 불확정적인 앎(요별)으로서의 전5식과 유분별(有分別) 즉 확정적인 앎(요별)으로서의 제6의식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정신적 대상(즉 법경)을 인식하고 정신적 행위(즉 법경에 대한 작용)를 행하는 제6의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有六識身。謂眼識耳鼻舌身意識。
眼識唯能了別青色。不能了別此是青色。意識亦能了別青色。乃至未能了別其名。不能了別此是青色。若能了別其名。爾時亦能了別青色。亦能了別此是青色。如青色黃赤白等色亦爾。
耳識唯能了別聲。不能了別此是聲。意識亦能了別聲。乃至未能了別其名。不能了別此是聲。若能了別其名。爾時亦能了別聲。亦能了別此是聲。
鼻識唯能了別香。不能了別此是香。意識亦能了別香。乃至未能了別其名。不能了別此是香。若能了別其名。爾時亦能了別香。亦能了別此是香。
舌識唯能了別味。不能了別此是味。意識亦能了別味。乃至未能了別其名。不能了別此是味。若能了別其名。爾時亦能了別味。亦能了別此是味。
身識唯能了別觸。不能了別此是觸。意識亦能了別觸。乃至未能了別其名。不能了別此是觸。若能了別其名。爾時亦能了別觸。亦能了別此是觸。
意識亦能了別諸法。
謂或執為我。或執我所。或執為斷或執為常。或撥無因。或撥無作。或復損減。
或執為尊。或執為勝。或執為上。或執第一。或執清淨。或執解脫。或執出離。
若惑若疑。若猶豫。若貪若瞋。若慢若癡。若麤若苦。若障若靜。若妙若離。若如病若如癰。若如箭若惱害。若無常若苦若空若無我。
若於因謂因謂集謂生謂緣。若於滅謂滅謂靜謂妙謂離。若於道謂道謂如謂行謂出。
若有因若有起若有是處。若有是事。若如理所引了別。若不如理所引了別。若非如理所引。非不如理所引了別。— 《아비달마식신족론》, 제6권, 〈4. 소연연온(所緣緣蘊)〉. 한문본
여섯 가지 식신[六識身]이 있으니, 이른바 안식과 이식ㆍ비식ㆍ설식ㆍ신식 및 의식이다.
안식(眼識)은 오직 파란색[靑色]만을 요별(了別)할 뿐이며 ‘이것은 파란색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의식[意識] 또한 파란색을 요별하는데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요별하기 전이면 ‘이것은 파란색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을 요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비로소 파란색도 요별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파란색이다’라고도 요별할 수 있다. 마치 파란색과 같아서 노란색ㆍ붉은색ㆍ흰색 등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이식(耳識)은 오직 소리[聲]만을 요별할 뿐이며 ‘이것은 소리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의식 또한 소리를 요별하는데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요별하기 전이면 ‘이것은 소리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을 요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비로소 소리도 요별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소리이다’라고도 요별할 수 있다.
비식(鼻識)은 오직 냄새[香]만을 요별할 뿐이며 ‘이것은 냄새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의식 또한 냄새를 요별하는데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요별하기 전이면 ‘이것은 냄새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을 요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비로소 냄새도 요별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냄새이다’라고도 요별할 수 있다.
설식(舌識)은 오직 맛[味]만을 요별할 뿐이며 ‘이것은 맛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의식 또한 맛을 요별하는데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요별하기 전이면 ‘이것은 맛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을 요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비로소 맛도 요별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맛이다’라고도 요별할 수 있다.
신식(身識)은 오직 감촉[觸]만을 요별할 뿐이며 ‘이것은 감촉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의식 또한 감촉을 요별하는데 그러나 아직 그 이름을 요별하기 전이면 ‘이것은 감촉이다’라고는 요별하지 못한다. 만일 그 이름을 요별할 수 있게 되면, 그때에는 비로소 감촉도 요별할 수 있고 또한 ‘이것은 감촉이다’라고도 요별할 수 있다.
의식(意識)은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을 확정적으로 요별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법(法, 즉 법경, 즉 정신적 대상)도 [불확정적으로도 또는 확정적으로도, 틀리게 또는 바르게] 요별한다.
이를테면 혹은 ‘나(我)’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내것[我所]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아주 없다[斷]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항상 있다[常]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인(因)이 없다고 부정하기도 하고, 혹은 작용[作]이 없다고 부정하기도 하며 혹은 다시 손감(損減)시키기도 한다.
혹은 높다[尊]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뛰어나다[勝]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으뜸[上]이라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제일[第一]이라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청정(淸淨)하다고 집착하기도 하고 혹은 해탈(解脫)하였다고 집착하기도 하며, 혹은 벗어났다[出離]고 집착하기도 한다.
또는 미혹하고 의심하고 망설이기도 하며, 또는 탐내고 성내고 오만하고 어리석기도 하며, 또는 거칠다 하고 괴롭다[苦]하고 막힌다[障]고 하며, 또는 고요하다[靜]하고 미묘하다[妙]하고 여읜다[離]고 하며, 또는 질병과 같다 하고 종기와 같다 하고 화살과 같다 하고 괴롭히고 해치는 것[惱害]과 같다 하며, 또는 무상(無常)하다 하고 괴롭다 하고 공(空)하다 하고 나라는 것이 없다[無我]고도 한다.
또는 인(因)에 대하여는 원인이라 하고 쌓임[集]이라 하고 생김[生]이라 하고 연(緣)이라고 하며, 또는 멸(滅)에 대하여는 사라진다 하고 고요하다[靜]하고 미묘하다[妙]하고 여읜다[離]하며, 도(道)에 대하여는 길이라 하고 여(如)라고 하고 행(行)이라 하고 벗어난다[出]고 한다.
또는 인(因)이 있다고 하고 일어남[起]이 있다고 하며, 또는 이런 도리가 있다고 하고, 또는 이러한 일이 있다고 하며, 또는 이치대로 이끈 바[如理所引]를 요별하고, 또는 이치대로 이끌지 않은 것을 요별하며, 또는 이치대로 이끈 바가 아닌 것과 이치대로 이끌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을 요별한다.— 《아비달마식신족론》, 제6권, 〈4. 소연연온(所緣緣蘊)〉. 한글본
심려결탁·추탁·추구탁
심려(審慮)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살피고 생각하다'로 심사숙고(深思熟考: 깊이 생각하고 깊이 고찰하다)를 뜻한다. 《구사론》에 따르면 심려(審慮)는 결탁(決度: 확인 판단)과 함께, 정견(正見: 바른 견해)이건 악견(惡見: 잘못된 견해)이건 모든 견(見: 견해)의 마음작용의 본질[性] 또는 공능(功能)을 이룬다.[26][27] 결탁(決度, 산스크리트어: saṃtīraṇa)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판단하고[決] 헤아린다[度]'인데,[28] 불교에서는 '확인 판단'의 뜻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어,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과는 차이가 있다.
《구사론》에서는 심려결탁(審慮決度)이 곧 견(見: 견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보다 정확히는, "심려한 후 결탁하는 것을 견(見: 견해)이라 이름한다[審慮為先決度名見]"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식(六識) 중 전5식은 '심려한 후 결탁하는 능력', 즉 견(見)의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이 능력은 6식 중에서 오직 제6의식만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여, 전5식과 제6의식을 분별하고 있다.[26][27] 정확히 말하자면, 세친은 《구사론》에서 '제6의식만이 견(見)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은데, 이런 표현은 마음과 마음작용의 이론, 즉 심 · 심소(心 · 心所) 이론에 어긋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세친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何故世間正見唯意識相應。以五識俱生慧不能決度故。
審慮為先決度名見。五識俱慧無如是能。以無分別是故非見。— 《구사론》, 제2권. 한문본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정견(世間正見)은 오로지 의식(意識, 즉 제6의식)과 상응(相應)하는 것이라고 한 것인가? 5식(五識)과 구생(俱生, 함께 일어남)하는 혜(慧)는 능히 결탁(決度)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려한 후 결탁하는 것[審慮為先決度]'을 일컬어 견(見)이라고 한다. 그런데 5식과 구생[俱, 함께 일어남]하는 혜(慧)는 이와 같은 공능[能]이 없으니, 무분별(無分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5식과 상응하는 혜는] 견(見)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구사론》, 제2권. 한글본
또한 《구사론》과 《성유식론》에서는 '심려한 후 결탁하는 것[審慮為先決度]'을 추탁(推度: 추리 판단, 추리하여 판단함) 또는 추구탁(推求度: 추리하고 탐구하여 판단함)이라고도 말하고 있다.[29][30][31][32][33] 추탁의 일반 사전적인 의미는 '추측하다, 미루어 짐작하다 헤아리다'인데,[34] 불교 용어로서의 추탁의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에서는 모두 견(見: 견해)이 혜(慧: 판단, 지혜)의 특수한 경우, 즉 따로 명칭을 붙일만한 일부인 것으로 본다. 즉, 혜(慧)가 더 광범위한 개념인 것으로 본다.[31][32][33][35]
말나식
아뢰야식
같이 보기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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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철환 (2003).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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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권오민 (2000). 〈아비달마불교의 새로운 인식을 위한 시론〉. 《한국불교학》 제27집판.
- 권오민 (2003). 《아비달마불교》. 민족사.
- 세우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949, T.1542). 《아비달마품류족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949(25-149), T.1542(26-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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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세친 지음,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K.955, T.1558). 《아비달마구사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955(27-453), T.1558(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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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안혜 지음, 현장 한역, 이한정 번역 (K.576, T.1605). 《대승아비달마잡집론》.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576(16-228), T.1606(3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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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 제바설마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K.947, T.1539). 《아비달마식신족론(阿毘達磨識身足論)》. 한글대장경 검색시스템 - 전자불전연구소 / 동국역경원. K.947 (25-1), T.1539 (2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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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외부 링크가 있음 (도움말)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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