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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재일조선인(在日朝鮮人, 일본어: 在日朝鮮人 자이니치 조센진[*]), 줄여서 재일(일본어: 在日 자이니치[*])은 특별영주자로서 일본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적의 사람을 말한다.[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재일동포, 재일교포라고 부른다.
이들을 일본인이나, 일본계 한국인 또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들은 엄연한 대한민국 국적의 사람으로, 1952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재일 한국인을 일본 국민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 분류했으며,[1]2010년에 대한민국 법무부는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을 대한민국으로 뚜렷이 명시했다[2]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전부터 살고 있던 재일 한국인인 올드커머(old comer)는 특별영주자이고, 국교정상화 이후에 이주한 뉴커머(new comer)는 일반영주자가 많다. 올드커머는 일제강점기와 1948년의 제주 4·3 사건 전후에 이주한 한국 남부 출신자가 많으며, 이들은 대한민국 국적자와 정식 국적이 아닌 조선적(朝鮮籍)[3]인 사람으로 구분된다.
일본 법무성 산하의 입국관리국의 2023년 말 기준 통계에 따르면, 등록 재일 한국인의 수는 43만4461 명[4]으로 전체 재일 외국인 가운데 재일 중국인(재일 대만인은 제외한다.), 재일 베트남인 에 이어서 3번째인 7%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적 보유자는 2012년 4만617 명에서 2013년 3만8491 명, 2014년 3만5753 명, 2015년 3만3939 명으로 계속 줄어들고 있고, 2023년 말 기준으로 2만4035 명이다.[5]
본적 | 인수 | % |
---|---|---|
서울특별시 | 57,574 | 9.62 |
부산광역시 | 25,213 | 4.21 |
대구광역시 | 2,148 | 0.36 |
대전광역시 | 1,878 | 0.31 |
경기도 | 26,523 | 4.43 |
충청남도 | 11,220 | 1.87 |
충청북도 | 9,449 | 1.58 |
전라남도 | 41,120 | 6.87 |
전라북도 | 10,627 | 1.78 |
경상남도 | 172,343 | 28.79 |
경상북도 | 125,392 | 20.94 |
강원도 | 4,579 | 0.76 |
제주특별자치도 | 99,421 | 16.61 |
불명확 | 1,506 | 0.25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3,001 | 0.50 |
기타 | 6,693 | 1.12 |
총수 | 598,687 | 100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로 인해 모든 대한제국 국민들의 국적이 일본 제국 국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후에 많은 한국인이 취업이나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 1919년에는 도쿄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한 2·8 독립 선언을 하여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923년에는 간토 대지진으로 혼란이 벌어진 가운데 약 6천 명의 재일 한국인이 흉흉한 민심을 폭력으로 분출시키려는 일본 민간인(자경단)에 살해당했다. 일본 아나키스트 및 사회주의자들 등까지도 희생되었다. 그러나 1929년, 미국 증권시장의 증시가격이 폭락하면서 시작된 대공황의 영향으로 조선의 경기가 나빠져, 일본에서 취업하기 위해 이주하는 사람이 한층 더 증가하였고, 1930년대 전반에 절정에 달했다.
1937년에 일본 제국은 중일 전쟁에 돌입하고 징병제를 바탕으로 많은 남자를 징병했으므로 노동력이 부족해,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서 1944년 9월에 그때까지 일본 제국 내지에만 전용 적용되었던 국민징용령을 조선 지역에도 적용하고 조선인을 알선, 징용하였는데, 이때 징용된 조선인 대다수는 주로 홋카이도, 가라후토 청 등 석탄 다산지에서 노동을 했다.
재일 한국인은 제국의회 중의원에 박춘금을 당선했다. 일본 제국은 귀족원 의원에 박영효 등을 지명했다.
전쟁이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치닫기 직전이었던 1945년 8월,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원자폭탄인 리틀보이와 팻 맨이 투하되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이 희생되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군수공장 등에 징용되었던 수많은 조선인들도 이때 같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때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한 보상은 오늘날 일본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 양측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전쟁이 끝난 당시 20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에 있었다. 이어서 GHQ 방침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등으로 말미암아 모든 한국인이 일본 국적을 잃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대한민국 국적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때, 귀국 비용을 일본 정부가 부담하고, 140만 명이 한국으로 돌아갔다[7]. 그러나 생계나 정치적인 문제,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상황 때문에 잔류한 숫자도 많았고, 이들이 사실상 재일 한국인 1세대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또한 1948년에 대한민국의 대표적 민중항쟁인 제주 4·3 사건이 발발했을 때와 여순사건이 발발했을 때와[8]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많은 한국인이 일본으로 밀입국함으로써 재일 동포 수가 늘어났다. 제주 4·3 사건 관련자들과 제주도민들은 군정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 반공단체의 만행과 가혹한 탄압을 피해 일본(주로 오사카지역)으로 밀입국한 이들이다. 그 후에 이들에 대한 처우 문제가 복합적으로 엉키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의민태자는 귀국을 희망하였으나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에 의한 귀국 금지로 재일 한국인이 되었다.[9]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의 혼란이 고착되면서, 일본의 재일 동포 사회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거나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 동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잔류한 재일 한국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각종 사회적 차별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 정부측에서 '자기 나라로 귀국하지 않고, 더군다나 일본으로 귀화할 생각도 없는 이들을 보호할 이유가 없다.'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재일 한국인 사회에서는 1955년을 기점으로 한반도의 남북 간의 반목이 민단과 총련의 대립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고, 이들은 서로를 비난하면서 대립하였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3년 남짓한 기간 사이에 일본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재일 조선인을 배에 태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돌려보낸다.[10] 이 과정에서 재일 한국인, 특히 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나가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으로 방해했다.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외교 관계 정상화 이후부터 일본에 건너가 정착한 한국 주민등록 소지자들은 보통 뉴커머(ニューカマー)로 불리고 있다.
1979년, 임현일(林賢一)군이 중학교 1학년이던 한국인의 이유로 집단 따돌림 폭행을 당하고, 견디지 못하자, 고층아파트를 투신 자살하여, 그 뒤인 고국의 1980년 임현일(林賢一)군 추도했으며, 학교 측에 과실의 인정됐는데, 이 사건 계기로 사과 한마디를 그렇지 않는다.
재일 한국인들은 4대악 제도인 지문날인 제도, 외국인등록증 상시휴대, 재입국허가 제도, 강제퇴거 제도 등의 폐지와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채용 및 국·공립학교 교원 채용시 국적조항 철폐, 지방자치단체 참정권 보장, 민족교육 육성 등을 요구해왔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에 이른바 '재일 한국인의 법적지위문제'가 현안으로 제기되었으며, 1991년 1월 10일 〈재일한국인 법적 지위 향상 및 처우개선에 대한 합의사항〉에서 재일 한국인 3세의 영주권 허가, 지문날인 제도 철폐, 국·공립학교 교원 임용기회 획득, 지방자치단체 공무원 임용기회 확대 등에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재일 한국인들을 외국인 취급하는 일본 사회의 노골적 차별, 민단과 총련으로 갈라진 재일 한국인 사회 내 분열,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냉대[11] 등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다. 영화 <우리 학교>에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재일 한국인의 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 또한 보여주고 있다.[12]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은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단체이며,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단체이다.
민단과 총련 이외에 1980년 이후의 대한민국 이민자가 결성된 단체도 있다.
GHQ들과 마찰이 가장 심했던 분야가 교육분야였는데, 미군의 명령에 의해 일본 측은 '일본의 교육 방침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재일 한국인들은 조선어를 기본적인 언어로 하는 '민족교육' 을 실시하는 '조선학교'를 세웠고, 미군의 명령에 의해 일본 측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해 조선학교폐쇄령을 내리고 강제로 학교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빚어져 사상자도 발생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948년 4월 24일에 효고현에서 있었던 한신교육투쟁이 있다.
초기 재일 한국인들은 당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무관심으로 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학교를 설립하였다. 재일 한국인들이 대부분 민단 계열이 아닌 총련 계열이었던 이유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민족교육 지원 등으로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세운 한국학교도 존재하지만, 조선학교에 비해서 그 수가 매우 적다. 동경한국학교, 건국 유·소·중·고등학교, 오사카 금강 인터내셔널 소학교·중학교·고등학교, 교토 국제 중학교·고등학교의 4개 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비판이 존재하는데, 조선학교에 비해 그 수가 적은데다가 학비도 비싼 편이여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가진 재일 동포도 조선학교에 어쩔 수 없이 입학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에는 조선학교와 민단 계열 학교 둘 다 선택을 하지 않고 일본의 공립학교나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일본 오사카를 비롯한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이주한 재일 한국인들을 ‘올드커머’(old comer)라고 지칭하는 반면, 일본의 패전후부터 특히 1980년대 초반 이후로 수도 도쿄를 중심으로한 간토 지방에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한 새로운 재일 한국인들을 ‘뉴커머’(new comer)라고 부르며 구분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에게 휴대가 의무화되어 있는 외국인 등록증의 국적란에는 두 가지 표기가 가능한데, '대한민국'과 '조선'이다. '조선'은 해방직후 자동으로 변경된 국적이고 이후 '대한민국'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국적을 변경할 수 없다. 재일 한국인은 외국을 여행할 때 재입국허가서를 여권 대신 사용한다. 여행국가의 비자를 받아 재입국허가서에 붙이고 입출국 도장을 받는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여행할 때에는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서 발급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을 발급받는다. 재일 한국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만 사용하게 된다. 재일 한국인 축구선수 정대세는 대한민국 국적으로 대한민국 여권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권을 모두 가지고 있다.[13]
대한민국의 모의투표에도 참가하였다.[14]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5월) |
재일 한국인은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아직까지 일본 내 선거권이 없지만, 2009년 민주당의 하토야마 내각에서 '재일참정권 부여' 논의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재외 한국인 선거권부여가 확정되었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 투표할 수 있다. 단, 국내에 거소가 신고되지 않은 재외 한국인은 비례대표에만 투표할 수 있다. 재외 한국인들의 첫 선거권행사는 2012년 5월, 19대 총선거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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