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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張烱[주 1], 1623년 음력 2월 25일 ~ 1669년 음력 1월 12일)은 조선 후기의 한학(漢學: 중국어) 역관이자 조선 20대 군주였던 경종의 외조부이다. 숙종 16년 정월에 발발한 원자 정호 사태로 외손자 경종이 숙종의 원자가 되면서 영의정에 추증됐으며, 이 해 5월 딸 장옥정(옥산부대빈 장씨)이 왕비 명호를 받으면서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추숭됐으나 부원군의 작호는 숙종 20년 2차 왕비 교체로 인해 옥정이 다시 후궁으로 강봉되면서 거두어졌다. 본관은 인동(仁洞)으로, 그의 고조인 장석손을 파조로 한 양주파다. 자(字)는 백야(白夜), 시호는 안헌(安憲))이다. 묘소는 수차례 이장을 거쳐 현재 고양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입장이 제한된다.
사역원 역관이었다. 신도비에는 그의 최종관직이 정9품 부봉사로 기록되어 있지만, 장남 장희식의 역과 취재 기록에는 종8품 봉사로 기록되어 있다. 병으로 일찍 퇴직하고 집에서 음률을 즐기며 지내다가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거문고를 즐겼다고 전한다.
아버지 장응인(張應仁)은 선조~인조 때 활약한 유명 역관으로 그의 이름과 행적이 《통문관지》에 기록되어 있다. 명에서 사신이나 차관이 올 때마다 차비관을 맡았고 아무리 탐욕스러운 자라고 할 지라도 조선에서 감히 토색질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1] 시재(詩才)가 뛰어났고, 전쟁 당시 무관(종6품 부장)으로 참전한 경력이 있다.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 이를 적은 종이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고, 자손에게도 명심할 것을 가르쳤다고 전한다.[주 2] 장응인의 생전 관직은 정3품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장형의 어머니 남포 박씨는 산학(算學) 별제(別提)[2] 박심의 딸이다.
장형은 일찍이 절충장군 고성립의 딸 제주 고씨와 혼인하였지만 그의 나이 23세에 상처하였다. 재취 부인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성립은 사역원 종4품 첨정으로 왜학 역관이었다. 윤씨의 친정 어머니 변씨는 소설 허생전에도 등장한 조선 최고의 갑부 변부자 가문의 딸로 사망하기 전에 아직 정산받지 못한 대출 액수를 확인하니 자그마치 은 50만냥이었다는 부호 역관 변승업의 당고모(큰할아버지의 딸, 아버지의 사촌자매)였다.[3] 아내의 오빠인 윤정석은 실록 중에 면포를 팔던 시상(市商)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한양 시전에서 면포를 팔 수 있는 건 오로지 육의전 뿐이다. 이는 윤정석이 육의전 상인이었으며, 육의전에서도 2등인 면포[주 3]를 팔았으니 상당한 부자였음을 알 수 있다.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체포됐던 윤정석의 공초내용에 따르면 희빈 장씨가 승은을 입은 궁녀로써 출궁되어 어머니 윤씨와 오빠 장희재 부부가 사는 친정에서 지낼 당시에 장희재의 집과 담 하나를 두고 이웃에 살았다고 한다.
역관의 신분으로 종1품 숭록대부에 오르고 더 이상 진급을 할 수 없어 그 공이 아들 뿐만 아니라 조카들에게까지 넘어갔다는 거물 역관이자 국중거부라는 별칭을 얻은 갑부 역관 장현은 그의 사촌형이다. 재취 부인 소생인 막내딸 장옥정을 궁녀로 보낸 것으로 전하는데, 그가 죽기 전에 장현의 권유에 따라 옥정을 궁녀로 만든 것인지 그의 사후에 옥정이 궁녀가 된 것인지는 의견만 분분할 뿐,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현의 딸도 효종 때에 나인이 되어 숙종 때 상궁으로 있었다.
일찍이 사별한 부인 고씨에게서 1남을, 재취 부인인 윤씨에게서 1남 2녀를 두었다. 재취 부인 소생인 막내딸이 바로 희빈 장씨이다.
전실 고씨가 낳은 아들인 장희식(1640 ~ ?)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역과식년시에 장원[주 4]을 한 수재였지만 일찍 요절하였다. 장희식의 졸년은 알려지지 않지만, 장희식이 취재 당시 이미 절충장군 이천연의 딸과 혼인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들여 승계하지 않고 차남인 장희재가 제주(祭主)가 되었던 것과 장희식의 최종관직이 장원이 처음 제수받는 종7품 직장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20세(1659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계실 윤씨에게서 훗날 김지중에게 출가한 장녀 장씨[주 5]와 차남 장희재(1651년 ~ 1701년), 차녀이자 막내딸 장옥정[주 6](1659년 ~ 1701년)을 보았다. 차남 장희재는 역과가 아닌 무과에 급제하여 경신년(1680년)에 내금위에 있었다.[4]
궁녀였던 막내딸이 숙종의 후궁이 되어 1688년 10월에 왕자를 생산하는데, 이 왕자가 바로 조선 20대 임금인 경종이다. 1689년 1월, 숙종이 서자에 불과한 이 왕자를 원자(元子: 왕의 적장자)[주 7]로 삼은 것이 원인이 되어 1689년 2월 2일에 기사환국이 발발했다. 같은 날인 2월 2일, 숙종은 원자의 외조부인 장형을 정1품 영의정으로, 장형의 아버지 장응인을 정1품 우의정으로, 장형의 할아버지 장수를 정1품 좌의정으로 각각 추증하였다.[주 8][주 9]
1689년 5월 2일, 송시열의 추천으로 왕비가 되었던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를 끝내 폐출한 숙종은 5월 6일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할 것을 선포한다. 권대운, 유명헌 등 남인이 반대하여 책봉을 3년 후로 연기하기로 하였지만[5][주 10]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버지인 장형을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으로, 전처 고씨(高氏)는 영주 부부인(瀛洲府夫人)을 추증하였으며, 윤씨(尹氏)는 파산 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봉하여 희빈 장씨가 비공식적이나마 이미 왕비임을 포고하였다. 1691년 9월 장형의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가 세워졌다.
1694년 4월 1일, 갑술환국이 발발하여 집권당인 남인이 출척되고 다시 서인의 독점 정권이 세워졌다. 4월 11일, 숙종은 포도대장 장희재가 국가죄인 이시도에게 사사로이 형벌을 가했다는 이유[주 11]로 긴급 체포하라 명하고, 이와 동시에 앞서 4월 9일에 궐 안 서궁(西宮)에서 지내게 해도 좋다고 허락한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입주 날짜를 길일과 상관없이 다음날로 당겨 옮기도록 하고 폐비 민씨의 처소에 호위를 배치했다. 다음날인 4월 12일에 그녀가 서궁으로 입주하자 숙종은 즉시 인현왕후의 복위를 선포하였다. 동시에 왕비 장씨는 국모가 두 명일 수 없다는 국법과 인현왕후가 먼저 왕비였으며 왕비 기간도 더 길었다는 이유로 1계급 강등되어 다시 희빈이 되었고, 장형 부부의 부원군 부부인 교지도 소각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숙종은 부원군으로 새겨진 장형의 묘비와 옥산부원군의 신도비의 처분을 허가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묘비를 철거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와 비판이 쇄도했으며 묘비가 훼손되거나 넘어뜨려지는 사태가 자주 발생하였다.[6] 1696년에 발생한 장형의 무덤 방자 사건[주 12]은 이러한 배경의 연장으로, 처음엔 노론 병조판서 신여철의 종 응선의 범행으로 판결되어 제주에 유배되어 역질로 추정되는 병을 앓던 장희재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동정론이 일어나던 중에 이 사건이 장희재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라는 주장이 생겨나 상황이 역전되고, 장희재는 아비의 무덤을 훼손한 강상의 죄와 세자를 저주한 대역죄 그리고 노론을 무고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될 위기에 처해졌다가 소론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1701년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가 죽은 후 장희재가 압송되자 다시 거론되어 장희재의 처 김씨(작은아기)의 증언으로 장희재의 죄로 판결되어 처형되기에 이르렀다.
제주(祭主)였던 아들 장희재가 처형되고 손자들도 유배되기에 이르자 숙종은 장희재의 재산 일부를 내어주고 장형의 신주와 제사를 장희재의 동복 누나의 남편인 김지중과 그들의 아들에게 기한적으로 맡도록 하였다. 장형의 묘소는 장씨 일족의 묘산이었던 서울 은평구에 소재하였으나 토지 개발의 이유로 이장되어 현재 경기도 고양시 고봉산에 소재하고 있다. 전처인 제주 고씨, 후처인 파평 윤씨와 셋이 함께 나란히 묻혀 있다.
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옥산부원군 시호 안헌 장 공 신도비명과 서문
지금의 왕(숙종) 16년 경오년(1690년) 2월 25일 왕이 조정에 명령했다. “국구(國舅: 왕의 장인) 옥산부원군의 묘소로 가는 길 오른쪽이 비었는데 석물을 갖추지 못했으니 내사가 맡아서 처리하고, 태학사 민암은 비명을 짓고, 호부 상서 오시복은 글씨를 쓰고, 공부 우시랑 권규는 전액을 쓰라.” 민암은 실로 황공하여 삼가 머리를 조아리며 쓴다.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큰 성씨이다. 시조 금용(金用)은 고려의 개국 공신으로 벼슬이 삼중대광신호위상장군을 지냈고, 고려 말에 안세(安世)는 덕녕부윤으로 태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곽성(霍城)에 살고 있을 때 그 이웃 덕녕(德寧)에 살았으므로 오랜 은혜가 있었다. 태조가 조선을 개국할 무렵 안세는 옥산(玉山)의 사저로 물러나 살았다. 태조가 여러 차례 조서를 내려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자 아들 중양(仲陽)을 관직에 불러 한성부좌윤까지 이르렀다. 그 일은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아들 수(脩)는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그 후 여러 세대를 지나 석손(碩孫)이라는 인물이 향교의 유생으로 있을 적에 아사(亞使)가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강서(講書)에 불합격되어 유적에서 제거되고 군대에 편입되었는데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부 세필(世弼)은 공로로 인해 절충의 품계를 받았고 돈녕부도정에 추증되었으며, 조부 수(壽)는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다.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모습은 의젓하였으며 마을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나서서 바로잡아 주었다. 공이 한 마디 말로 결판을 내니 비록 패한 자들도 마음속으로는 승복했다. 80세가 넘을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가의대부에 제수 받았고, 흰 눈썹과 흰머리가 빛나는 빼어난 모습으로 거리를 지나가면 마치 지상에 나타난 신선 같았다.
아버지는 의정부좌의정에 추증된 행 첨지중추부사 응인(應仁)이다. 성품이 호탕하고 재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고 노래도 잘했다. 가도(椵島)의 전쟁에 부장으로 따라갔을 때 길바닥에 금은이 떨어져 있어 사람들은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나 응인은 못 본 척 혼자서 노래를 불렀다. 집에 있을 때는 가르치는 학생이 항상 수십 명이었고 대부분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 임종 때 유언하기를, “나는 평생 동안 선한 사람을 내 친족처럼 좋아했고, 악한 사람은 원수처럼 미워했다. 후세 자손들은 내 말을 가슴속에 새겨 두어라.” 라고 했다. 부인은 정경부인에 추증된 박씨(朴氏)로서 본관은 남포이고, 산학별제 심(沈)의 딸이다. 계해년(1623년) 2월 25일 공을 낳았다.
공의 이름은 경(烱)이고 자는 백야(伯夜)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총명이 뛰어났다. 10살에 처음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글을 두어 번만 읽으면 당장 줄줄 외우곤 했다. 가훈을 마음에 새기고 문밖을 나가지 않고 부지런히 공부만 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며 어른처럼 의젓하니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찬했다. 장성해서는 관직이 사역원부봉사가 되었다.
공의 종형제들은 돈을 많이 모아 일국의 갑부가 되었다. 그러나 공은 늘 청빈한 생활을 하며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분수에 자족하며 부러워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병이 나자 조용한 방에 가만히 앉아서 거문고와 노래를 즐기니 세상 사람들이 남북완이라고 불렀다. 기유년(1669년) 정월 12일 병으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47세였다. 불광리(佛光里: 현재 서울 은평구 불광동)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 선영 옆에 장례 지냈다. 나중에 영의정 옥산부원군에 추증되었고, 앞서 말한 것처럼 3대가 추은(推恩)을 받았다. 왕의 장인으로서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절충 고성립(高誠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아들 희식(希栻)을 낳았는데 희식은 후사 없이 요절했다. 두 번째 부인 윤씨(尹氏)는 사역원첨정 성립(誠立)의 딸이다. 1남 2녀를 두었는데, 둘째 딸이 바로 왕비(장희빈)이다. 어린 나이에 간택되어 대궐에 들어가 성장한 뒤 비빈의 자리에 올라 원자를 길렀다. 성스런 성품을 타고 났으니 실로 우리나라의 무궁한 복이 아닐까? 무성하구나! 첫째 딸은 관상감 직장 김지중(金志重)에게 출가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둘째 아들 희재(希載)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재 훈련원부정 겸 내승이고, 사과 김덕립(金德立)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3남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옛말에 “선을 쌓은 집안은 남은 경사가 있다.”라는 말이 있고, “공후(公侯)의 후손은 반드시 복을 누린다.”는 말도 있다. 덕령공의 굳은 절개는 후손들을 창성하게 하여 몇 세대를 내려와 의정공에 이르르자 밝게 빛나진 않았지만, 삼대 째 쌓은 덕이 한데 뭉쳐서 성녀가 탄생하여 국모가 된 것이다. 참으로 집안과 국가의 경사이고 은택이 자손에게 미친 것으로 천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명왈(銘曰),
화산 높이 솟아 왕성의 진 되고 한 갈래 서쪽으로 무성한 숲 되었네 하늘이 좋은 땅 열어 공의 선영이고 줄기 따라 산기슭에 정기 모였네 하늘이 일을 하여 궁중의 빈 되니 집안의 상서로움 문중의 경사라 모두가 덕령군의 절개 때문이네 성쇠에 따라 세상도 대우하는 법 떨치지 못하다가 갑자기 창성하니 쌓은 덕으로 인해 빛 더욱 밝았네 오직 나라의 복이요 집안의 경사라 예전에도 드문 일 사람들이 놀라네 백세 뒤의 사람들 이 비문 살펴보라
숭정기원 무진년 후 64년 신미년(1691년) 9월 일 세움.
숭정대부 행병조판서 겸지경연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세자좌빈객 민암(閔黯) 지음.
자헌대부 호조판서 겸 동지경연사 오시복(吳始復) 글씨.
통정대부 공조참의 지제교 권규(權珪) 전서(篆書).
有明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玉山府院君諡安憲張公神道碑銘幷序
今 上之十有六年庚午二月二十五日 上命于朝曰國舅玉山府院君墓道之右闕而不具已令內司修治太學士黯製其文戶部尙 書始復書之又工部右侍郎珪篆其額臣黯誠惶誠恐謹拜手稽手而颺言曰仁同之張 國之大姓也始朝金用高麗開國功臣官三重大匡神虎衛上將軍季世有諱安世爲德寧府尹我 太祖潛龍時家霍城德寧隣壤也有奮恩及我 朝革命公退居玉山私苐 太祖大王累 降書召之終不起令子仲陽就仕官至漢城府左尹其事載輿地勝覽子脩官至司憲府掌令後數世有諱碩孫以校儒値亞使巡列邑講書不通落籍編行伍卽公之高祖也曾祖諱世弼以勞 授折衝階 曾敦寧府都正祖諱壽 曾議政府右議政公天資重厚儀觀偉然閭閻中事或有難決者咸就以正公以片言斷之雖負者猶心服焉壽過八耋 恩授嘉義階厖眉鶴髮輝暎於街陌之間望之若地上仙考 曾議政府左議政行僉知中樞府事諱應仁性豪擧疎財利喜讀書能文且善歌椵島之役公以褊裨從軍金銀布地人爭拾取公如無見獨自長歌居家敎授生徒常不減累十人多成材臨終有遺敎槪曰吾平生善善如親族惡惡如仇讐後世子孫宜服膺焉妣 曾貞卿夫人朴氏籍藍浦算學別提沈之女也以癸亥二月二十五日生公公諱烱字伯夜公幼而端莊聰慧絶倫十歲始受學讀不過數遍輒成誦佩服家訓不出戶庭孜孜進學不少捲動止嚴若成人隣里嘖嘖稱歎旣壯仕司譯院爲副奉事公之諸從廢著富甲一國公世守淸貧不問生産任眞安分無所欽艶且不幸抱疾從容一室以琴歌自娛世闢之南北阮也己酉正月十二日以疾終于家享年四十七葬于佛光里卯坐酉向之原先塋之側後 曾領議政玉山府院君推 恩三代封爵如右以 國舅貴也初娶折衝高誠立之女生子希栻早夭無後繼室尹氏司譯院僉正誠立之女也有一子二女第二女卽我 王妃殿下弱年選入 宮及長由妃嬪進位 坤極育我 元子生有聖質實我東方無疆之休猗歟盛哉一女適觀象監直長金志重生三男一女皆幼次男希載登武科今官訓練院副正兼內乘娶司果金德立之女生三男皆幼古語曰積善之家必有餘慶又曰公侯之後終必復焉以德寧公之全節其後嗣宣昌而替及至議政公雖潛光不耀三世種德篤生 聖女爲我 國母肇慶邦家澤及子姓蓋亦有天道焉銘曰 華山揷天作鎭 王城一支西蟠蔚鬱鬱蒼蒼天開吉地卽公祖塋逶迤磅礡沙麓孕精自天作合曰嬪于 京祥符甲觀慶溢 宗祊緬惟德寧姱節修名家有隆替世因重輕幾乎不振忽然大昌積之其厚發其發益光惟 國之休亦家之禎事曠今古榮動瞻聆百世在後請考斯銘 崇禎紀元戊辰之後六十四年辛未九月 日立
崇政大夫行兵曹判書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官事 世子左賓客臣閔黯奉 敎撰 資憲大夫戶曹判書同知經筵事臣吳始復奉 敎書 通政大夫工曹議知製敎臣權珪奉 敎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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