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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영(李允榮, 1890년 8월 19일 ~ 1975년 10월 15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독립운동가 및 교육자 겸 기독교(감리회) 목사 출신이고, 대한민국의 목회자 겸 정치인이다. 본관은 단양이며, 평안북도 영변 출신이다. 호는 백사(白史).
백사 이윤영 白史 李允榮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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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제2대 사회부 장관 | |
임기 | 1948년 12월 24일 ~ 1950년 11월 23일 |
전임 | 전진한 |
후임 | 허정 |
대통령 | 이승만 |
부통령 | 이시영 |
총리 | 이범석 |
차관 | 오종식 사회부 차관 최창순 사회부 차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0년 8월 19일 |
출생지 | 조선 평안도 영변 |
거주지 | 대한제국 평안북도 신의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75년 10월 15일 | (85세)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349-204번지에서 노환으로 병사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평양 숭실사범전문학교 전문학사 경성 감리교신학교 전문학사 |
경력 | 국무총리 서리 무임소 장관 조선민주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조선민주당 국회의원 국민의 당 최고위원 겸 당무위원 |
정당 | 무소속 |
본관 | 단양 |
부모 | 아버지 이용필(李龍弼) |
배우자 | 이마대 |
자녀 | 2남 6녀 |
친인척 | 5촌 조카 이범석(李範晳, 1922년~2000년, 개신교 목사)[1] |
종교 | 유교(성리학) → 개신교(감리회) |
3·1운동 때 독립 선언 강연회를 갖고 시위를 하다가 피체되었고, 1940년대 창씨 개명 거부 및 한일기독교 통합에 반대하여 목사 자격 정지를 받기도 했다. 해방 후 조만식 등과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했다가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부당수로 활동했고, 월남후 총리서리에 천거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한국민주당의 인준부결로 낙마했다. 이후 세 번 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낙마했다.
조만식의 측근이었다가 월남 후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제1공화국 당시 무임소 장관·사회부 장관 등을 지냈고, 이기붕의 반대파에 서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5·16 군사 정변 후 군정연장 반대투쟁위원회 의장, 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이윤영은 1890년 8월 19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에서 이용필(李龍弼)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6년부터 1905년까지 한학을 수학하여 이미 1901년 12살이 되던 해에 사서삼경을 독파하였으며 1905년 미국감리교 선교사가 설립한 숭덕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숭덕중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1908년 경성 중앙YMCA영어학교 중퇴 후 1909년 경성공업전습소(훗날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토지측량법을 배우다가 그마저도 중퇴하고 1910년 평양 숭실사범전문학교(崇實師範專門學校)로 진학하였다.
1912년 숭실사범전문학교를 나온 그는 1913년 운산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 1913년 12월, 운산보통학교장을 그만두고 1914년 3월, 상경하여 1915년부터 1917년까지 경성 감리교신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1917년 경성부 감리교신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뒤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해 전도사로 강연 활동을 하다가 개척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1919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일신보통학교장으로 교회일을 겸무할 때 3·1만세운동에 호응하여[2], 3·1 운동 때 민족대표자 33인으로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순천 근처 신창읍에서 독립선언 강연회와 시위운동을 전개, 지도하였다가 주모자로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 1년 2개월간 복역했다. 1920년에 출옥하였다.
출감후 배천·진남포·개성 등지에서 감리교회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요시찰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1934년 평양 남산현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2]
정일형 일가와도 가까웠던 그는 1936년 12월 26일 평양 정의여고 강당에서 정일형과 이태영의 결혼식에 주례를 섰다.[3] 결혼식 축사는 도산 안창호가 했다.[3]
1940년대 초 한·일기독교통합예비회담인 가마쿠라회의(鏞倉會議)에 윤치호(尹致昊)·신흥우(申興雨) 등과 함께 한국인측 7인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참석, 한일 기독교단 통합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기독교통합은 곧 우리 나라 교회의 해산을 전제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는 가마쿠라 회담에서의 조일 기독교통합을 저지하였으나, 귀국 후 총독부의 압력으로 목사 자격 정지 처분을 당하였다. 일제강점기 후반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신학교의 강사와 섬유공장의 감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평양 광성중학교, 정의여학교, 개성 호수돈여학교, 영변 숭덕중학교, 평양여자고등성경학교, 정진여학교 등의 재단 이사로 활동했고, 감리회 총리원 사회국장, 기독신보, 기독교서회, 평양기독병원의 이사로도 활약하는 한편 평양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8·15 광복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에 참여하였고, 조만식(曺晩植)을 위원장으로 평양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 조만식 등과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평양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45년 10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게 되면서 공산주의 진영과 마찰을 빚다가 신탁통치반대결의를 경성으로 보낸 것이 문제가 되자 1946년 2월 한근조 등 다른 당원들과 월남하였다. 이후 남한에서 조선민주당을 재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그가 이승만의 측근으로 발탁되면서 반(反) 이승만 노선을 걷게 된 한근조와는 결별하게 된다.
1946년 1월에는 김구, 조소앙, 김성수, 이승만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1월 26일 경교장에서 열린 반탁독립투쟁회 결성에 참여하고 반탁투쟁회 지도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서울시 종로구 갑구에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5월 31일 제헌 국회 개원식 당일 이승만의 요청으로 국회 개원을 감사드리는 의미의 기도를 주도하였다.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4]
7월 22일 이승만에 의해 초대 국무총리서리로 인준되었으나 국회 내의 한민당계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제1공화국 기간 중 4번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으나 4번 모두 인준부결되었다. 8월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의 한 사람으로 입각하였다. 그해 10월 6일 경제원조회담 제1차 회의에 재무부장관 김도연, 기획처장관 이순탁, 법체처장 유진오 등과 함께 참여, 협상 도중 10월 12일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수산물과 구호물자 원조를 지원받는 한편 한국정부를 지도감독한다고 명시한 조항을 내정간섭 조항이라 하여 삭제를 요구하여 성사시켰다. 1950년 1월 9일 학생정구연맹 고문에 위촉되었다.
이후 무임소장관에 다시 임명되었으며, 제2대 사회부장관을 지냈다. 한국 전쟁 중 사회부 장관으로 전선을 시찰하기도 했다. 1952년 다시 무임소장관이 되었다. 무임소 장관 재직 중 다시 국무총리 서리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부결되었다. 그는 무임소장관으로 계속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다.
1952년 3월 제3대 부통령 선거에 부통령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학장을 지냈다. 1956년 3월 20일 제4대 대한웅변협회 회장에 선출되었다.[5] 1957년 8월 1일 대한웅변협회장직을 사퇴하였다.
1956년 다시 제4대 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9년 이윤영은 나라의 운이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승만에게 진언을 하러 경무대로 찾아갔다.[6] 그러나 이기붕이 못만나게 해 놓아서 결국 이윤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섰다. 대통령 면회를 거절당하자 이윤영은 부통령 후보에 다시 입후보하였다. 주위에서 부통령 입후보는 해서 무엇하느냐고 말리기도 하였다.[6] 그러나 이윤영은 이기붕을 낙선시키기 위해서 출마한다고 하였다.
씨름판에 나가는 사람이 꼭 이기려고 나가느냐? 씨름에 져도 잠뱅이나 찢으려 나가는 거지! 이기붕이를 떨구기 위해서다.[6]
이기붕은 사람을 보내 이윤영에게 돈 1억원을 보내드릴 터이니 사퇴하고 자기를 밀어 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이윤영은 크게 나무라고 해서 되돌려보냈다.[6]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그는 낙선하였다. 이후 이기붕 세력의 견제를 받아 한동안 경무대에 출입하지 못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잠시 경무대에 출입하였으나 이승만은 곧 하야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 목회 활동과 강연 활동을 하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군정연장 반대투쟁위원회 의장, 국민의 당 최고위원을 지냈다. 생애 후반에는 재이북부조합동경모대회(在以北父祖合同敬慕大會) 대회장에 피선되었다.[2]
6.25 때 피난학교 시절의 광성고등학교 재건에도 참여한 후 종신재단이사로 봉직하였다. 1969년 국토통일원 위원에 피선되었고, 그해 삼선 개헌안 처리를 전후하여 공화당 국민투표대책위원에 위촉되었다.
1948년 7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해 이윤영을 총리 지명자로 발표했다. 이윤영은 북한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이었으므로 민족통일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지만, 국회는 132대 59의 표결로 인준을 거부했다.[8]
1950년 4월 3일 이범석이 정치적인 이유로 국무총리를 사퇴하였다.[9] 이승만은 3일 밤 원내 각파 대표들을 경무대로 초청하여 조병옥, 신흥우, 신성모를 총리로 추천하였으나 각파에서 난색을 보이자 다시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국회에 승인 요청을 했다.[9] 그러나 4월 6일 국회 표결에서 재석 155명 중 찬성 68표, 반대 83표, 기권 3표로 부결되었다.[9]
1952년 10월 5일 국무총리 장택상이 사임하자 이승만은 이윤영을 3번째로 후임 총리에 지명하여 국회에 인준요청을 해놓고 국회인준시까지의 총리 서리로 재무장관 백두진을 임명했으나 이윤영은 다시 부결되었다.[10]
이승만의 다른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이윤영 선생은 참 점잖으신 분이었다. 이박사의 동지가 되어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걷다가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몰이해로 고생하시다 가셨으니 유감천만입니다.[6]'라고 평하였다.
그는 각박하게 변하는 사회인심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밉살스러운 장면이었다. 어려움이 있을 때에 친구를 아는 것이 참된 친구이다. 이러한 실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 인심은 참새떼와 같이 곡식 알을 먹을 대는 무더기로 날아와 주워먹고 다 먹은 뒤에는 훌쩍 날아가 버린다. 사회에서 보는 세상 인심은 의리, 도덕, 우정보다 먹을 것과, 이익, 권리 등을 보고는 모여들었다가 탐할 것이 없어진 후에는 다 가버리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11]
정일형과는 인척관계였다. 이윤영의 부인 이마대는 정일형의 어머니의 6촌 여동생이었다. 따라서 정일형은 이윤영 처형의 아들, 즉 처조카뻘 되는 사이[12]였다.
이태영 역시 이윤영이 평양 남산현 교회 목사로 부임했을 때 평양 남산현교회의 성도였다. 이태영은 남산현교회에 다니며 주일학교 학생반 선생을 했으므로 이윤영 목사와 자주 만나게 되었다. 이윤영은 이태영을 끔찍이 아꼈다고 한다.[12] 그러나 그는 이승만의 측근이 되고, 정일형은 민주당계 정당에 가담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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