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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시백(李時白, 1581년 11월 15일(음력 10월 10일) ∼ 1660년 6월 9일(음력 5월 2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돈시(敦詩), 호는 조암(釣巖),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연안이다. 오성 이항복,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다.
판서를 7회 역임하고 영의정에 이르렀지만 청렴하였다.
이귀의 아들이며, 어려서 백사 이항복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유생으로 있으면서 인조반정 때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다.[1]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가 되어 이천에서 길목을 지켰으며 안현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진무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수원 방어사로 인조를 무사히 강화도로 대피시켰다. 1629년 이후 판결사가 되었다가 양주목사, 강화유수를 연이어 지내고 1633년, 병조참판을 지내고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과 남한산성수어사를 겸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병조판서로서 남한산성을 지켰으며, 소현세자가 죽고 인조가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할 때, 그는 세손(世孫)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1638년, 공조판서로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하고 1638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청나라에 볼모로 서자를 보냇던 일로 여산에 중도부처되고 1639년, 풀려나서 충용사가 되었으며 1644년 이후에는 한성부판윤, 판의금부사,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거쳐 1646년, 다시 병조판서가 되고[2] 1649년, 호조판서를 지낸 뒤 이조판서, 좌참찬, 좌찬성을 거쳐 1650년, 우의정, 1652년, 좌의정, 1655년, 영의정에 올랐다.
1652년 효종 때 청나라 북경에 다녀와서 영의정까지 지냈다. 어려서 성혼·김장생·이항복 등에게 배웠으며 풍채가 당당하고 힘이 세었다고 한다. 또한 지혜가 있었으며 항상 겸손하고 청백하였다. 김육의 건의로 호남 지방에도 대동법을 실시하게 하였다.[3]
한편, 유명한 군담 소설인 《박씨전》에서 박씨 부인의 남편으로도 서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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