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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에 존재하던 히브리인들의 왕국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스라엘 왕국(아람어: 𐤉𐤔𐤓𐤀𐤋, 히브리어: ממלכת ישראל המאוחדת) 또는 헤브라이 왕국은 고대 이스라엘에 존재하던 히브리인들의 왕국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국가이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과 구분하기 위해 이 시대를 통일왕국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이스라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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𐤉𐤔𐤓𐤀𐤋[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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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기브아 (기원전 1030년 ~ 1010년) 마하나임 (기원전 1010년 ~ 1008년) 헤브론 (기원전 1008년 ~ 1003년) 예루살렘 (기원전 1003년 ~ 930년) | |||
정치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왕 BC 1047년 ~ BC 1010년 BC 1010년 ~ BC 1008년 BC 1008년 ~ BC 970년 BC 970년 ~ BC 931년 BC 931년 ~ BC 930년 | 사울(초대) 이스보셋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말대) | |||
왕조 | 다윗 왕조 | |||
인문 | ||||
공용어 | 고대 히브리어 | |||
데모님 | 이스라엘인 | |||
종교 | ||||
종교 | 야훼교, 가나안교 | |||
기타 | ||||
현재 국가 |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 요르단 시리아 |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실존에 대해 역사학계 내에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2][3][4] 개중에는 구약성경의 기록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자들이 있는 반면, 성경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허구라고 보는 자들도 있으며 이들 가운데 성경의 증언이 과장되었으며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5] 통일 왕국의 존재를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로 통일 왕국이 기원전 1047년경에서 기원전 930년경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본다.
중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100-1550년)에 가나안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6]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550-1200년) 동안 가나안의 대부분은 이집트 신왕국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형태로 남았다.[7] 바다 민족의 침입 등 후기 청동기 시대의 붕괴로 이집트의 지배권은 완전히 무너지고 가나안은 혼란에 빠졌다.[8][9] 하솔, 벧스안, 므깃도, 에크론, 아쉬돗 및 아스글론은 큰 타격을 입었다.[10]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1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이집트 비문인 메르넵타 비문(Merneptah Stele)에 처음으로 등장한다.[11] 이들은 이 지역에서 태어난 고대 셈어를 사용하는 민족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2] 현대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인과 그들의 문화는 야훼를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단일 숭배(후에는 일신교) 종교의 발전을 통해 다른 가나안 민족들과 분리되는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고 본다.[13][14][15] 이들은 이후 성서 히브리어로 알려진 히브리어의 고대 형태를 사용했다.[16] 기원전 1200년경 무렵, 기후 변화와 사회 변화로 인해 고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며 도시인들에게서 곡물을 사먹던 유목민들이 도시들이 쇠락하자 곡물을 자체적으로 생산해야 해서 정착 생활로 바꾸어 정착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의 시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 유목민이 주류였지만, 가나안의 도시 왕국들에서 이탈한 사회 하층민 계층("하비루 Habiru / 아피루 Apiru"는 사회적 하층민을 가리키는 명칭) 역시 초기 이스라엘의 일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이 메르넵타 비문에 등장한 시기인 기원전 1200년경과 비슷한 시기부터 블레셋 사람들은 남쪽 해안 평야에 정착했다[18].
고고학자 파울라 맥넛(Paula McNutt)은 철기 시대의 가나안 사람들이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인식했다며, "혼인 금지, 가족사 및 계보, 종교 등을 통해 이웃과 차별화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19]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고지대에 약 25개 정도의 마을이 있었지만 1차 철기 시대 말에는 300개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착 인구는 20,000명에서 40,000명으로 두 배가 되었다.[19] 마을은 북쪽에 더 많고 더 컸으며 아마도 유적을 남기지 않은 목가적 유목민과 고원을 공유했을 것이다.[19] 이 마을 사람들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고고학자와 역사가들은 그들을 특별히 이스라엘인으로 정의할 수 있는 어떤 특징도 식별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20] 처음에는 네방형(four-room) 집이나 띠가 있는 입구를 가진 항아리들을 이스라엘계 유적을 구분하는데 사용되었으나, 이후 이러한 유적이 고지대 밖에서도 확인되었기에 더 이상 구분하는 기준으로 완전히 신뢰받지는 않는다.[20] 고지대 마을의 도자기는 저지대 가나안 지역의 도자기보다 훨씬 제한적이지만 유형적으로는 이전의 가나안 도자기에서 발전했다.[21] 이스라엘 핀켈슈타인(Israel Finkelstein)은 고지대에서 발견되는 타원형 또는 원형 주거터와 돼지뼈가 발굴되지 않는 것을 인종의 표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것이 고지 생활에 대한 상식적인 적응이므로 반드시 이스라엘 유적을 구분하는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22] 다른 아람 유적지들에서도 초기 가나안 및 후기 블레셋 발굴과 달리 돼지뼈가 발굴되지 않았다.
The Bible Unearthed (2001) 에서 Finkelstein과 Silberman은 최근 연구를 요약했다. 그들은 1967년까지 팔레스타인 서부 고원지대에 있는 이스라엘의 심장부가 사실상 고고학적 미지의 땅 이었다고 설명했다 . 그 이후로 유다 지파, 베냐민 지파,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의 전통적인 영토를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이러한 조사는 철기 시대 초기에 이스라엘 땅에 존재했던 블레셋과 가나안 사회와 대조되는 새로운 문화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드러냈다[23]. 이 새로운 문화는 돼지고기가 부족하고(어디서나 블레셋 식단의 20%를 돼지고기가 차지함), 고도로 장식된 도자기를 사용하는 블레셋/가나안 관습을 포기하고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은 출애굽과 그에 따른 정복 이 아니라 기존 가나안-블레셋 문화의 변형에서 비롯되었다.[24]
이러한 조사는 초기 이스라엘 연구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몇 세대에 걸쳐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빽빽한 고원 촌락 네트워크의 유적 발견은 기원전 1200년경 가나안 중앙 산악 지대에서 극적인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음을 시사했습니다. 폭력적인 침략의 흔적이나 명확하게 정의된 민족 집단의 침투조차 없었습니다. 대신 라이프 스타일의 혁명인 것 같았습니다. 남쪽 유다 산에서 북쪽 사마리아 산에 이르기까지 인구가 희박했던 고지대에 와해되고 와해되고 있던 가나안 성읍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약 250개의 산꼭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최초의 이스라엘인이 있었습니다[23]. These surveys revolutionized the study of early Israel.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of a dense network of highland villages – all apparently established within the span of few generations – indicated that a dramatic social transformation had taken place in the central hill country of Canaan around 1200 BCE. There was no sign of violent invasion or even the infiltration of a clearly defined ethnic group. Instead, it seemed to be a revolution in lifestyle. In the formerly sparsely populated highlands from the Judean hills in the south to the hills of Samaria in the north, far from the Canaanite cities that were in the process of collapse and disintegration, about two-hundred fifty hilltop communities suddenly sprang up. Here were the first Israelites[23].
따라서 현대 학자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고지에 있던 기존 백성들로부터 평화롭게 내부적으로 발생했다고 본다[25].
광범위한 고고학적 발굴은 초기 철기 시대 동안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제공했다. 고고학적 증거는 마을과 같은 사회를 나타내지만 자원이 더 제한적이고 인구가 적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주로 작은 마을에 살았는데, 그 중 가장 큰 마을은 인구가 300~400명 정도였다.[19] 그들의 마을은 언덕 꼭대기에 지어졌다. 그들의 집은 공동 뜰 주위에 무리지어 지어졌다. 그들은 돌 기초와 때로는 나무로 만든 2층이 있는 흙벽돌로 방이 서너 개 있는 집을 지었다. 주민들은 농사와 목축업을 하며 살았다. 그들은 산비탈에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다양한 작물을 심고 과수원을 유지했다. 마을은 대체로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했고 경제적 교류가 만연했다. 성경에 따르면, 이스라엘 왕정이 일어나기 전에 초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재판관들에 의해 인도되었다. 학자들은 이 기록의 역사성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지역 추장과 정치가 보안을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마을은 성벽이 없었지만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의 주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기록 및 문자의 사용은 작은 사이트/지역에도 보급되었고 기록이 가능해졌다.[19]
Israel Finkelstein에 따르면 , BCE 10세기에 기브온-기브아 고원을 기반으로 급작스럽게 대규모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성서의 시삭인 쇼솅크 1세에 의해 파괴된 후 작은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어 회귀하였다고 한다[26]. 그러나 기원전 950년에서 900년 사이에 또 다른 대규모 정치가 북부 고지대에서 나타나 결국 이스라엘 왕국의 전신으로 간주될 수 있는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다[27]. 이스라엘 왕국은 중요한 지역 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다 왕국은 기원전 9세기 후반에 번성하기 시작했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현대 고고학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던 이론은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이 제시한 '저연대Low Chronology' 이론이다.[28][29]:59–61 이 이론에서 제시하는 층서학적 모델에 따르면, 그동안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것으로 인식되던 유물이나 유적들(게셀, 므깃도, 하솔의 마병장)은 기원전 10세기가 아닌 기원전 9세기로 비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다윗 왕은 기원전 10세기~9세기로 비정하는데, 강한 왕권을 가졌다기 보단 유다의 소규모 부족의 족장 수준의 인물로 북이스라엘 왕국과는 무관하다고 본다.[30][31][32][33]
그러나 모든 고고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았다.[34][35][36] 아미하이 마자르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신데, 예루살렘과 키르벳 케이야파에 대한 발굴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오늘날 일부 고고학자들은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존재를 인정하고,[37] 마자르 교수의 수정 연대 이론을 따른다.[38]
성경에 따르면 판관 사무엘에 의해서 사울이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되어 나라를 세웠다. 사울은 치세초기 외적들을 격파했지만 아말렉의 왕 아각의 처분을 놓고 사무엘과 불화를 일으켰고, 사무엘은 사울 몰래 베들레헴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며 새 왕으로 세웠다. 백성들의 신망이 다윗에게 향하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 말기수아와 함께 사망하였다. 약 2년간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과 다윗이 권력 투쟁을 벌인 끝에 다윗이 왕위에 올랐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까지 이어지다가 르호보암때 북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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