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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디아 주민 퇴거(Expulsion of the Acadians, 프랑스어: Le Grand Dérangement)는 오늘 날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주, 뉴브런즈윅주 노바스코샤주, 마리팀스에 개척했던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에서 영국군들이 주민들을 강제로 퇴거시킨 사건이다.[1] 퇴거(1755-1764)는 7년 전쟁의 북미 전선인 프랑스-인디언 전쟁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누벨프랑스를 상대로 한 영국군의 작전의 일부였다. 영국은 아카디아 주민을 13개 식민지로 추방했으며, 1758년 이후에는 아카디아 주민들을 영국과 프랑스로 사민시켰다. 이 지역의 14,100명의 아카디아 주민들 중 약 11,500명의 아카디아 주민들이 추방되었다.[2][3] (1764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2,600명의 아카디아 주민들이 식민지에 머물렀다는 것을 나타내며, 아마도 등록 기피로 추정된다.[4]) 스페인 계승 전쟁 동안 영국군은 포위 공격으로 식민지의 수도인 로열 요새를 점령했다. 분쟁을 종결한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은 영국에 식민지를 양도하고 아카디아 주민들이 그들의 땅을 지킬 수 있게 했다. 이후 45년 동안 아카디아 주민들은 영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 맹세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같은 기간 동안 그들은 영국군에 대항한 다양한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루이부르그와 보세주르 요새와 같은 프랑스 요새에 보급선을 유지했다.[5] 결과적으로 영국군은 아카디아 주민들에 의해 제기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루이부르그 지역에 공급하는 보급선을 영구히 제거하려고 노력했다.[6][7]
중립을 지켜왔던 아카디아 주민들과 아카디아 점령에 저항했던 아카디아 주민을 구별하지 않고 영국 총독 찰스 로렌스와 노바스코샤 위원회는 그들을 전면 퇴거시키라고 명령했다.[8] 최초의 퇴거 파동에서 아카디아 주민들은 다른 영국 식민지로 추방되었다. 두 번째 파동에서는 이주한 루이지애나에서 영국과 프랑스로 사민되었다. 아카디아 주민은 처음에는 캐나다의 식민지화되지 않은 프랑스어권 식민지인 현재의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주와 케이프 브레튼 섬 등지로 도주를 했다. 제2차 퇴거 파동에서는 아카디아 주민들은 투옥되거나 추방되었다.
퇴거를 통해 아카디아 주민과 아바나키 연맹은 1744년 이후 계속된 영국의 침략에 대응하여 영국에 대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조지 왕 전쟁, 르 루트르 신부 전쟁 참조[9])
영국군이 루이부르를 격퇴하고 미크매크와 아카디아 민병대를 약화시키는 등 군사적 목표를 달성함에 따라, 퇴거의 결과는 주로 민간인 인구와 이 지역 경제의 황폐화였다. 퇴거로 인해 수천 명의 아카디아 주민들이 배를 잃어버리고 질병과 익사로 인해 사망했다.
1764년 7월 11일 영국 정부는 충성 맹세만 한다면 아카디아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영국 영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한 평의회 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시인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그의 유명한 〈에반젤린〉(Evangeline)에서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했다. 아카디아 사학자 모리스 배스크에 따르면, 엔반젤린의 이야기는 추방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에 영향을 미쳤지만, 중립적인 아카디아 주민을 강조하고, 대영 제국에 저항한 사람들을 강조하지 않았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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