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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심지원(沈之源, 1593년 ~ 1662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원지(源之), 호는 만사(晩沙),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효종의 부마도위(駙馬) 청평도위(靑平都尉) 심익현(沈益顯)의 아버지이다.
1620년(광해군 12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대북파(大北派)의 중심인물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이었던 종조부 심종도(沈宗道)가 대북파에 가담하기를 요청하자 따르지 않고 벼슬에 오르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1]
세자시강원 설서,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충청도 암행어사,[2] 사헌부 지평,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강원도 암행어사,[3] 함경도 안찰어사,[4] 사헌부 집의, 홍문관 응교, 사간원 사간, 영천군수를 거쳐, 다시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노모 때문에 뒤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이미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조익(趙翼) · 윤계(尹啓) 등과 의병을 모집하려 했으나 윤계가 죽어 실패하였다. 이에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했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되었다.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7년동안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홍주목사로 다시 서용되고, 이후, 이조참의,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좌부승지, 호조참의를 지냈다.
우승지, 좌승지, 도승지, 대사간, 평안도 관찰사, 대사헌, 동지의금부사, 대사헌,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관사로 있을 때인 1652년(효종 3년)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효종의 둘째 딸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청평도위(靑平都尉)가 되었다.[5] 효종과 사돈지간이 되자, 곧 바로 형조판서에 제수되고, 이조판서 겸 지경연관사 겸 세자시강원 좌빈객이 되었다. 1653년 정조사(正朝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후, 1654년 형조판서, 행 대사간, 겸 지경연관사, 행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1656년 좌의정, 1657년 영중추부사가 되어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58년 영의정에 올랐다.[6] 이후, 영의정으로 훈련도감 도제조를 겸하고,[7] 1659년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그 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되었다.[8] 그리고, 총호사(摠護使)도 겸하였다.[9]
효종이 승하하자, 좌의정으로서 원상(院相)과 총호사(摠護使)를 겸하였다. 1662년(현종 3년) 1월 28일 서거할 때까지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죽었다. 삼가 살피건대, 지원은 일찍 과거에 합격하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그뒤 병자 호란 때 미처 어가를 수행하지 못해 유배를 당했다가 석방된 뒤로 주군(州郡)이나 맡으며 초라하게 지냈는데, 그의 아들 심익현(沈益顯)이 부마(駙馬)가 되면서부터 다시 기세를 떨쳐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일 처리를 우물쭈물하고 자리만 지킨다는 비난이 있긴 하였으나, 경박한 논의를 좋아하지 않았고 전형(銓衡)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도 뇌물과 관련된 소문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꽤 칭찬하였다.
— 현종실록 5권, 현종 3년 1월 28일 임인 1번째기사
자의대왕대비(慈懿大王大妃)의 복제 문제(服制問題)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宋時烈)의 뜻을 쫓으면서도 남인 조경(趙絅)을 적극 신구(伸救: 억울함을 펴도록 구원함)하기도 하였다. 심지원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김홍욱(金弘郁)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한 점, 강화설진(江華設鎭)을 반대한 점, 양역(良役)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士族)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겠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심지원(沈之源)
《심지원 묘 및 신도비》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전방으로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역 좌측아래에 신도비가 있는데 전체높이가 295cm, 비높이 208cm, 너비 100cm, 두께 35.5cm이다. 비문은 김수항(金壽恒)이 글을 짓고 신익상(申翼相)이 글과 전액(篆額)을 써서 숙종 12년(1686)에 건립하였다. 1992년 12월 31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심지원이 1614년 윤관 장군의 묘를 파헤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조상의 묘를 조성한 사건이 원인이 되어, 2006년까지 파평 윤씨와 무려 392년 동안이나 두 가문이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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