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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친일반민족행위자, 예조판서, 공조판서, 한일은행 은행장, 국채보상의연금 10만원 출연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민영휘(閔泳徽, 1852년 양력 5월 15일 ~ 1935년 양력 12월 30일)는 조선 말기의 정치인으로, 초명은 영준(泳駿)이며, 자는 군팔(君八), 호는 하정(荷汀)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민광훈의 8대손이며 명성황후의 15촌 조카이다. 친일파 인물이다.
1877년(고종 14년) 별시(別試)에서 병과(丙科)로 합격한 뒤 검열을 지내고 주서(主書)·겸설서·정언(正言)·부수찬을 거쳐서 동지경연사·지돈령부사 등으로 승진을 거듭하며 화려한 관력을 쌓게 되었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와의 촌수는 상대적으로 먼 편이었지만 여흥 민씨의 대표급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이 많이 집중되어, 임오군란 때는 가옥이 부서지기도 했다.
민씨 척족의 중심인물로서 청나라와 밀착한 수구파의 거두로서 1884년 갑신정변 때 청나라 군대를 이용하여 친일 개화 세력을 몰아냈으며, 위안스카이(원세개)와 결탁한 뒤 사대당 내각에 들어가 전권을 휘둘렀다. 1886년 참의 내무부사, 1887년 도승지를 역임하였고, 도승지로서 주차 일본 변리공사가 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평안감사에 올랐다. 1889년 강화부 유수로 전직했다가 협판 내무부사에 오르고 이어 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하였고, 1891년 경리사·이조 판서를 거쳐 연무공원판리(鍊武公院瓣理), 이후 민씨 세력의 수령으로서 1893년에는 내무부 독판·통영사(統營使)·선혜아문 당상을 겸직하고 이듬해 친군경리사(親軍經理使)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위안스카이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음력 6월 의정부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갑오경장 와중에 민씨 척족과 함께 실각하여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임자도(荏子島)로 유배되었다가 나중에 평양으로 잠행하여 벽동(碧潼)의 청나라 포대에 잡혔다가 청나라로 도망갔다. 이듬해인 1895년 대사령(大赦令)으로 흥선대원군 측의 이준용과 교환되어 귀국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후원하여 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시종원경, 헌병대 사령관, 1906년 7월 5일 육군 부장으로 표훈원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다.
이후로는 정치권에서는 밀려나 1906년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하였다. 1907년 9월 19일 육군 부장직에서 퇴역하였다.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금을 받았으며, 그밖에 매국 공채 5만원을 사들였다.
민영휘는 경제에 밝아 쉽게 갑부가 되었다. 관직에 있을 때 수탈한 재물을 이후에 잘 불려,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귀족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에 성공한 경우로, ‘권력형 부정축재’로 분류된다.[2]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7년 5월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민영휘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3] 했고,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민영휘의 재산까지 국가에 귀속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4] 민영휘의 후손들은 이 결정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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