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문
조선의 수도의 4대문 중 서쪽의 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조선의 수도의 4대문 중 서쪽의 문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돈의문(敦義門)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대문(大門) 중의 하나로 서쪽의 대문이다. 또한 돈의문에는 서대문(西大門)이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근대에 와서야 불린 이름이다.[주 1] ‘새문’, ‘신문’(新門)이라고도 불렀으며, 인근의 새문안로(신문로)나 '새문안교회' 등의 이름은 여기서 따온 말이다.
또한 돈의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이름은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신 중 의(義)를 넣어 만든 것이다.지금은 철거됐다
1396년(태조 5년) 9월 다른 성문과 함께 완공되었는데[1], 축성 당시에는 돈의문이 사직동 고개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돈의문의 자리가 경복궁의 좌우 팔과 같으며 그 지맥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통행을 금지시켜야한다는 풍수학자 최양선의 건의로 돈의문을 닫고 서전문(西箭門)을 설치하였다.[2] 처음에는 이숙번의 집 앞에 있는 옛 길을 따라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숙번의 건의로 상왕인 정종의 인덕궁 앞 소동(小洞)에 세워졌다.[3]
1422년(세종 4년) 2월에는 서전문을 막고 다시 돈의문을 열었다.[4] 이 때 예전에 지었던 돈의문과 서전문을 모두 철거하고 오늘날 신문로에 있는 언덕 위에 새로이 건설하였다. 1711년(숙종 37년)에 문과 누각이 낡아 새로 지었다.[5]
1915년 3월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돈의문이 철거되고 도로를 개설하였다. 경성전차궤도를 복선화하기 위해 흥인지문처럼 문을 우회하는 대신 철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경매 끝에 205원 50전에 염덕기(廉德基)가 목재를 낙찰받았으며 그 외의 귀중한 부속물은 총독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6] 6월에 강제 철거가 완료되었다.[7]
2009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인근의 서대문 고가차도를 철거하고 2013년까지 돈의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8], 예산 및 원형 복원 등의 문제가 겹쳐 2022년까지 중장기 과제로 미뤄졌다.[9] 교통, 보상 등 현실적인 복원이 요원한 상황에서 2018년 12월 6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우미건설, 문화재청, 서울시, 제일기획이 돈의문의 증강현실 복원을 위해 MOU를 체결했다. 2019년 8월에 증강현실 복원이 완료되었다.[10]
돈의문은 서대문구에 소재하였으므로 그 구명(區名)을 서대문에서 따 왔지만, 지금은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중구 관할 지역에 속한다. 현재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 앞 정동사거리에 '돈의문 터'라는 표지석이 있다.
대략적인 모습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무지개문을 큼지막하게 내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집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다. 둘레의 담장은 곧 한양도성과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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