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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1947년 9월 25일 ~)는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1967년 클래식 음악 편곡가 첫 데뷔한 그는 서울예술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를 졸업했고 한국에서 지휘를 배울 수 없던 시절 베를린 음악대학의 Hans-Martin Rabenstein 교수에게 찾아가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다. 1977년, 4년 만에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하며 지휘자로 정식 데뷔했다.
KBS 교향악단을 12년간 이끌었고,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전격 부임했다. 연간 10회의 연주에 머물던 수원시향을 연간 60여회 이상 연주하는 악단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예술의전당 기획프로그램인《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를 기획하여 6년 간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1998년에는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현,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하여 《로비 음악회》, 《도서관 음악회》, 《갤러리 음악회》, 《울릉도 음악회》등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전국 방방 곡곡을 다니며 클래식 대중화에 앞장섰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오케스트라를 8년만에 연간 135회 공연, 관객 12만명을 동원하는 국민 오케스트라로 발전시켰다.[2] 2006년~2010년 경기필하모닉, 2010년~2014년 인천 시립교향악단을 거쳐 2015년부터 성남시립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및 예술 총 감독을 맡고 있다. 2015년부터 한국 경제신문사에서 창단한 한경필하모닉의 초대 지휘자 겸 예술감독으로도 위촉되어 기업의 문화예술 참여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3] 2013년~2019년 서울예술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2019년부터 명예교장으로 위촉되었다.
《그네》를 작곡한 아버지 금수현이 지은 이름 ‘금난새’는 대한민국에 등록된 최초의 순 한국어 이름이다. 금난새의 형은 1945년생으로 아버지가 한국어 이름 ‘뿌리’로 형의 출생 신고를 하려는데 한자가 있어야 한다고 하여 거부당해 어쩔 수 없이 ‘나라’라는 한자 이름으로 했다. 해방된 이후에도 일제 잔재가 남아있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신문에 기고를 통해 순 한국어 이름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정부에서 인정하여 제도가 바뀐 후 금난새는 순 한국어 이름으로 등록됐다. 금난새 동생으로 태어난 3명은 모두 한글이름으로 ‘ㄴ’자 돌림으로 지었고 금난새의 자녀들은 ‘ㄷ’자 돌림으로 지었다.[4] 아버지의 성격이 독특해 ‘돈키호테’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금난새는 이러한 아버지를 닮아갔다.[5]
금난새는 음악가인 아버지를 보며 막연히 음악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TV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작곡가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하는 것을 보고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2] 1960년대 초였던 대한민국에는 지휘자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는데 누구에게도 지휘를 배울 방법이 없어 혼자서 독학을 했다. 그러다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우던 중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도전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금난새는 친구들 스무명 가량을 모아 《서울 영 앙상블》을 만들어 연습실을 찾다가 세종로에 있던 미국 공보원의 강당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6] 서쪽에서 연주하면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안오고, 동쪽에서 연주하면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안올 것이 우려됐는데 미국 공보원은 중간즈음에 위치하여 최적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인이었던 원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2층 강당을 연습실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원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으나 금난새가 2달에 한 번쯤은 미국 작품도 연주하겠다고 하자 원장은 흔쾌히 승낙해 그 곳에서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6] 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가 1년 만에 그만뒀다.
음대를 졸업했으나 지휘자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무조건 외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70년대였던 시절 유학이 쉽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세계 청소년 음악 연맹》이라는 곳에 참가할 기회를 얻어 유학을 간 후 현지에서 지휘 선생님을 찾을 셈이었다.[7] 20대 후반이었던 금난새는 그렇게 음악의 도시로 알려진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을 가 베를린 음악대학을 무작정 찾아갔다. 그 대학의 지휘과 교수 두 명인 알렌도르프와 라벤슈타인 교수의 연락처를 받았는데 장군 이름같은 알렌도르프 보다는 음악가같은 이름의 라벤슈타인 교수를 선택해 연락하자 교수는 다음날 집으로 오라고 했다. 금난새는 교수에게 그동안의 음악 공부를 한 여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라벤슈타인은 나이가 너무 많아 늦었다며 귀국해 유학 수속을 밟고 독일로 다시 오려면 1~2년은 걸리기 때문에 여기서 바로 공부하는게 좋겠다고 조언하면서 받아주겠다고 말했다.[8] 금난새는 바로 공부를 시작했고 자금이나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금난새를 수업료도 받지 않고 도와준 교수에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후에도 학생이나 학부모가 도움을 요청해오면 그때를 떠올리며 도와준다고 했다. 금난새가 발견해 유명한 음악가로 성장한 사람으로는 대표적으로 장한나가 있다. 수원시향을 이끌던 시절 11살이던 장한나가 오디션 보러 왔는데 실력이 좋아 협연을 시켜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도움을 줬다.[9] 금난새는 “재능을 봤을 때 그냥 지나치지 않고 기회를 줘야 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위대한 사회란 누구든지 꿈을 가질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
베를린 음대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최초로 카라얀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4위로 입상하여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카라얀 국제 음악 콩쿠르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자를 데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1969년에 만든 콩쿠르다. 이곳에서 입상한 사람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된다.
이 콩쿠르 시상식 당일 3명이 지휘하던 날 금난새는 첫 번째로 지휘하고 시간이 남아 매달 할아버지 합창단 지휘 아르바이트를하던 곳에 가서 재빨리 지휘하고 돌아와 시상식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당일 파티 겸 음악회를 하는 날이여서 일정이 늦어져 애를 먹기도 했다. 금난새는 “할아버지 합창단이나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모두 똑같은 음악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라고 말했다.[10] 귀국 후 첫 번째로 맡게 된 곳이 KBS교향악단으로 최연소 지휘자가 되었다. 이 곳에서 12년간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992년에 수원시립교향악단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11]
수원시향이 금난새에게 연락해와 “지휘자도 없고 문제가 많다”고 호소해왔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지휘자를 자처한 것이었다.[11] 대한민국 최고의 교향악단이던 KBS 교향악단에서 알려지지도 않고 규모도 작은 수원시향으로 가자 사람들은 금난새가 불명예스럽게 나가는걸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금난새는 “좋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도 좋은 지휘자이지만, 망가진 오케스트라를 살려내는 것도 능력있는 지휘자”라는 생각을 가져 옮긴 것이었다. 당시 수원시향은 1년에 8~10회 정도만 연주하는 활동이 적은 오케스트라였다. 어느 정도인가 알아보기 위해 500석 규모의 수원시향 연주회에 갔는데 80명이 연주하는데 관객이 80명밖에 없었다.[12] 그것마저도 2부에서 40명으로 줄었는데 연주자의 가족들이 왔다가 얼굴만 보고 나가버린 탓이었다.
그러나 연주 실력은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좀더 개선시키기 위해 아이디어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매년 50만원 정도의 후원금이 들어왔는데 단원들에게 나누니 10만원도 안되는 수준이었고 차라리 이를 나누기보단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자 하여 오페라를 계획했다.[8] 제작비가 보통 2~3억원이 드는 오페라를 500만원으로 만들기엔 태부족이었다. 일단 성악가 한 명당 섭외비 150만원씩 3명을 섭외하고 나머지 50만원으로 진행비를 충당하여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무대 제작이 가장 큰 문제였다. 수원에 클래식을 좋아하는 큰 가구점 사장에게 연락해 가구를 빌리고싶다고 부탁했다. 사장은 가구 무료대여를 흔쾌히 승낙했고 일반적인 무대 세트로 만들어놓은 가짜 가구보다 더 현실감 있는 오페라 세트가 완성되어 관객 1,600석이 모두 꽉차게 됐다.[8]
공연에는 수원시장과 경기도지사도 왔는데 이들은 단돈 500만원으로 이러한 무대를 만들어 놓은 것에 크게 감동받고 쓰레기 매립장을 야외 음악당으로 만들고 연습실도 만들었다. 새로운 문화공간이 창조되자 수원시민들은 좋아했다. 수원시향이 성공하자 예술의 전당에서 연락이 와 금난새에게 청소년 음악회를 제안했다. 이전부터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회를 생각해오던 금난새는 흔쾌히 승낙하고 《금난새와 함께 하는 세계음악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연주회를 시작했다.[13] 그리고 그 때까지 무료로 연주회를 했는데 이를 바꿔 2,000원을 받아 청소년들에게 돈을 내고 음악회를 보는 습관을 길러주자고 제안했다. 2,400석이었던 이 연주회는 2001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최초로 유료 음악회 전석 전회 매진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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