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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의 서자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계양군 이증(桂陽君 李璔, 1427년 9월 11일(음력 8월 12일) ~ 1464년 9월 26일(음력 8월 16일))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의 8남이자 서차남이며 생모는 신빈 김씨이다. 세종이 영응대군과 더불어 가장 총애한 아들이었다.[1]
본관은 전주, 이름은 증(璔)이며 시호는 충소(忠昭)이고 자는 현지(顯之)이다.
이복 형인 수양대군을 도와 세조 반정에 참여하여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1등(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에 녹훈되었다. 부인은 한확의 딸 정선군부인 한씨로, 소혜왕후의 친언니이다. 의경세자에게는 이복 삼촌이자 손윗 동서가 된다. 정인지, 김질 등과 사돈이다.
1427년(세종 9년) 8월 12일, 세종(世宗)과 당시 궁인이었던 신빈 김씨(愼嬪 金氏)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세종에게는 서차자이며 여덟째 아들이다.
1434년(세종 16년) 1월, 계양군(桂陽君)에 봉해졌다.
1437년(세종 19년), 한확(韓確)의 둘째 딸인 정선군부인 한씨(旌善郡夫人 韓氏)와 혼인하여 3남 3녀를 두었다. 정선군부인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언니이기도 하다.
계양군은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을 지지하였으며, 이복 동생인 정현옹주의 남편 영천위 윤사로와 함께 금성대군을 탄핵하였고, 같은 해 파평위(坡平尉) 윤암(尹巖)과 함께 금성대군과 혜빈 양씨 등을 공격하기도 했다.
1455년(세조 1년), 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 1등(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에 녹훈되고 계양군에 다시 봉작되었다. 세조 즉위 직후 측근에서 서무의 출납을 맡으면서 세조의 신뢰를 얻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이후 각종 왕실 행사에 참여하였다.
1460년(세조 6년) 해양대군(예종)이 혼인할 때 가례도감 제조를 겸하여, 혼인을 주관하였다. 친동생 익현군(翼峴君) 등과 자주 술을 마시다가 1463년 5월 4일 동생 익현군이 술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때 세조는 '이것은 모두 계양군(桂陽君)의 허물이다. 의창군(義昌君)이 술로써 죽었는데, 익현군(翼峴君)도 또한 술로써 죽으니 매우 슬프다.' 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4월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그해 8월 16일에 사망하였다.
계양군 이증의 졸기
-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이 졸(卒)하니,
- 3일 동안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거애(擧哀)하였다.
- 임금(세조)이 심히 애도하여 육선(肉膳)을 물리쳤다.
(중략)
- 세종이 끔찍이 사랑하였고,
- 이증(李璔)이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공부하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 임금(세조)이 즉위할 때 좌익(佐翼)의 공(功)이 있었고,
- 임금이 중하게 여겨 서무를 출납하도록 하여 은고(恩顧)가 더욱 융숭하였다.
- 이증(李璔)이 병들자, 임금이 내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 끝내 효험을 볼 수가 없었다.
(중략)
- 이증(李璔)은 성질이 단아하고, 용의가 아름답고, 담화를 잘하였으며,
-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 겸손 공경하였고,
- 일찍이 귀(貴)하고 세력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한 적이 없었다.
- 이때에 주색으로 인하여 졸하였다.
처음 경기도 양주군 동촌면 백석리에 묻혔으며, 1480년 7월 27일 정선군부인이 사망하여 그해 9월 18일 동원이역으로 조성되었다. 뒤에 경기도 남양주시 일패동 묘적산(妙寂山) 신좌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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