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역에서 발생한 탈선 사고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JR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일본어:
덧붙여 JR서일본에서는,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가 아닌 「후쿠치야마선 열차 사고」라고 호칭하고 있다[1]. 언론 등에서는 JR 다카라즈카선 탈선 사고나 아마가사키 JR 탈선 사고 등으로도 호칭된다[2][3].
사고는 9시 18분경,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의 JR 후쿠치야마 선에 있는 반경 300m의 우측 커브 구간(쓰카구치 역을 1 km 지난 지점/아마가사키 역을 약 1.4 km 앞둔 지점)에서 발생했다.
사고 열차는 다카라즈카 역에서 가타마치 선 도시샤마에 역까지 운행하는 상행 쾌속 전동차(3량, 4량 병결 편성)로 아마가사키 방면 선두 5량이 탈선했다. 선두 2량은 선로 가의 9층 맨션 건물에 충돌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되었다. 열차에는 사고 발생시 주변 열차에 비상사태를 알리기 위한 열차 방호 무선 장치가 탑재되어 있었으나 탈선에 의해 전력공급이 끊겨 해당 열차 차장이 조작한 방호 무선은 동작하지 않았다. 그런 사태에 대비하여 준비된 예비 전원 변환 수동조작 방법은 승무원에게 철저하게 교육되어 있지 않았고, 결국 사고 열차는 방호무선을 발령하지 못했다. 사고 당시 하행선에는 신오사카 발 키노사키 온천(城崎温泉)행 특급 '기타킨키(北近畿)'가 접근 중이었으나 사고를 목격한 인근 주민에 의해 옆에 있던 건널목의 비상버튼이 눌려 특수신호발광기가 점등되었고 이에 기관사가 이상을 감지, 대략 100m 앞에서 정차하여 방호무선을 발령했기 때문에 이중 사고라는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이 비상버튼의 작동으로 사고발생 직후 JR서일본은 역 구내 등에서 '건널목 사고'라는 안내를 반복하고 있었다. 전동차가 충돌한 지점의 가선 기둥은 주행하고 있던 선로의 반대측(곡선의 바깥 쪽)에만 있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붕괴되지 않았다.
덧붙여 현장의 커브는 상행선은 원래 직선 구간이었지만(맨션 앞의 도로가 선로였음), JR 도자이 선 개업과 동시에 하행선과 같은 경로로 변경되었다.
사고 당시 열차는 앞부분의 4량 편성과 도중역인 가타마치 선 교타나베역에서 분할할 예정인 3량 편성을 병결한 7량 편성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1·4·5·7호차에 열차의 운행상태를 기록(비상제동 작동 전후 5초간)하는 '모니터 제어장치'가 설치되어 있었고, 사고 후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가 이것을 해석하였는데, 앞에서 5호차(후부 3량 편성의 선두 차량)와 7호차에 설치되어 있던 장치에 108 km/h라는 기록이 표시되어 있었다. 다만, 이것이 곧 탈선시의 속도라고는 할 수 없다.
선두차량이 탈선에 의해 급감속하여 잭나이프 현상이 발생하였고, 재편성 작업을 쉽게 하기 위해 볼트와 너트를 연결된 구조였던 연결기 부분이 꺾여 접히는 바람에 연쇄추돌이 발생하여 피해가 확대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고 당시 차량 맨 앞의 선두부는 편륜주행으로 왼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가선 기둥에 접촉하여 그대로 직진, 맨션 가의 입체 주차장과 거기에 있던 승용차와 함께 1층의 주차장 부분으로 돌진하여 벽에 충돌했다. 2번째 차량은 선두차량과 같이 편륜주행 끝에 맨션에 차체 측면으로 충돌하였고 3번째 차량이 2번째 차량에 추돌하면서 건물 모퉁이에 달라붙은 모습으로 대파되었다. 3호차는 2호차와 4호차에 상행 방향(아마가사키 방면)을 앞뒤가 거꾸로 된 상태로 비스듬하게 차단하며 정지했다. 4호차도 3호차를 사이에 두고 하행 방향(후쿠치야마 방면)의 선로와 서쪽 길의 반을 비스듬하게 차단한 상태로 각각 정지했다.
사고 발생 당초에는, 사고 차량의 2호차가 1호차로 오인되어 있었고, 1호차는 발견되어 있지 않았다. 이후, 원래 있어야 할 차량의 수와 목시로 확인할 수 있는 차량수가 일치하지 않았고 1호차의 존재가 확인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색이 실시되어 발견되었다. 차량 가운데, 앞부분 Z16편성의 4량은 사고 당일 폐차수속이 완료되었다. 사고가 발생한 주차장 주변에 휘발유 유출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피해자의 안전을 위해 버너나 전동 커터를 이용하지 못해 구조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3호차부터 차량 해체 작업이 동시에 실시되었으며, 모든 작업은 3일 후인 4월 28일 종료되었다. 사고 차량은 자유석 방식의 통근열차였기 때문에 탑승했던 정확한 승객 수는 확정되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반경 300m짜리 곡선 구간의 제한속도는 사고 후에 70 km/h에서 60 km/h로, 곡선구간에 직전의 직선 구간의 제한속도는 120 km/h에서 95 km/h로 각각 변경되었다.
주민에 대한 2차적 피해는 없었지만, 직접적인 사고의 희생자는 사망자 107명(기관사 포함), 부상자 562명으로 전대미문의 대참사가 되었다. 이는 일본의 철도사고 사상 7번째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희생자의 상당수는 1호차와 2호차에서 발생했다. 기관사는 압사, 승객 사인의 4할은 두부(頭部)손상이었으며 질식이나 다발 외상·좌멸 증후군도 확인되었다.
이후 사고로는 부상당하지 않았던 승객이나 맨션 거주자, 구조작업에 참가한 주변 주민들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는 등 큰 영향을 미쳤다.
사고 당시 맨션에는 47세대가 거주하고 있었지만, 붕괴 가능성을 고려하여 JR서일본이 준비한 호텔 등으로 피난했다. 이후에도 2세대가 남아 있었지만 2005년 8월 상순까지 모두 이주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지진)의 경험이 활용되어 신속한 대응이 이루어졌다. 사고 발생 당시 가장 먼저 구조에 나선 것은 인근 주민이나 기업이며, 기업 중에는 공장 가동을 일시정지하고 참가한 곳도 있었다. 부상자의 반수 가까이를 주민이나 기업이 의료 기관에 반송하였으며, 후에 구조·구원 활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2005년 7월 76개 기업·단체와 개인 1명에 대해 정부로부터 감사장이, 8월에는 48개 기업·단체와 개인 34명에 효고현경으로부터 감사장이, 9월에는 32개 기업·단체와 개인 30명에 대해 아마가사키 시로부터 감사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또, 11월에는 자사의 업무를 모두 정지시키고 구조활동·부지 내를 활동거점으로서 구조에 임한 기업과 2차 재해 회피를 위해 선로 내에 들어가 반대편 열차에 이상을 알린 개인 1명에 대해서 훈장이 수여되었다.
일본 항공·철도사고 조사위원회(이하 사고조)는 2006년 12월 20일 사고의 원인은 '기관사가 무선 교신에 정신을 빼앗겨 제동조작이 늦어 70 km/h 제한인 오른쪽 커브에 116 km/h로 진입했기 때문'이라는 사실 조사보고 제안서를 공표했다. 사실관계에 대한 기술만으로 300페이지를 넘어 일본의 사고 조사 보고서로서는 사상 최대의 분량이 되었다.
사고조는 JR 서일본측의 반론 등을 듣는 공청회를 연 뒤 재차 사고 조사보고 서안을 제출하여 수리되었고, 이후 2007년 2월 최종보고서를 정리했다.
2007년 6월 위원회는 기관사가 사고 직전에 범한 오버런으로 징계 처분받을 것을 우려하여 차장의 무선교신에 정신을 빼앗긴 나머지 현장의 커브에서 제동이 늦었다는 결론을 냈다. 그리고 사고의 배경에 'JR 서일본의 기관사에 대한 징벌적인 일근교육이나 징계가 있다'고 하여 JR 서일본의 기업체질을 비판하는 최종보고서를 공표하여 2년에 걸친 사고 조사가 종료되었다. 사고 조사위원회가 사고 원인에 대해 기업체질의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최종보고를 받아 사고 원인에 대해 사고조에 감정을 의뢰했던 효고현경은 형사책임 추궁을 위해 수사를 본격화한 상태다.
사고 열차는 이타미(伊丹)역을 오전 9시 16분경에 출발한 후, 70 km/h 제한인 현장 오른쪽 커브(반경 304 m)에 116 km/h 로 진입했다. 이 때, 기관사는 커브 진입 직후 상용 제동 1단, 3~4단째를 약 0.2초, 5단을 약 0.8초, 6단을 약 0.2초, 7단을 약 2.4초째에 각각 사용하여 105 km/h 로 감속한 단계에서 상용 최대제동인 8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벌써 우측 차륜이 원심력으로 공중에 뜬 상태가 되어 9시 18분 54초경 1호차가 왼쪽으로 전도하듯이 탈선했다. 그리고 이어서 2~5호차가 탈선했다.
브레이크 레버가 비상제동 위치에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주행중에 비상제동을 조작한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사고 충격에 의해 레버가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JR 서일본은 당초 현장 커브의 전복한계속도가 133 km/h 라고 공표했으나, 이것은 공차(空車)상태를 가정한 것이었으며 좌우동(左右動)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고조는 현장과 같은 반경 304m의 오른쪽 커브에서 당시와 같은 '1호차 93명, 2호차 133명 승차'라는 조건으로 시뮬레이션을 거듭한 결과, 열차의 좌우동도 고려할 경우 전복한계속도는 106 km/h였다고 판정했다.[4] 이에 따라 사고는 단순한 속도초과에 의한 횡전(橫轉)탈선으로 판명되었다.
사고조는 당초부터 기관사의 심리가 큰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보고서에서도 기관사와 차장의 행동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기관사는 전날 근무를 끝낸 후 하나텐 출장소(히가시오사카시)에서 숙박하였고, 2005년 4월 25일 오전 6시 8분에 점호를 받아 승무를 개시했다. 8시 31분, 사고 차량인 아마가사키 발 다카라즈카 행 회송 전동차에 탑승했다.
기관사의 심리적 영향은 다카라즈카 역 구내에서 ATS에 의해 정지한 8시 54분 무렵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카라즈카 발차 후 차장의 보고를 무선으로 청취하다가 이타미 역 앞의 두 번의 경보 음성을 듣지 못해 이타미 역을 오버런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기관사는 사체 발견 당시 오른손의 장갑을 벗고 비닐 케이스로도 쓸 수 있는 특수한 빨강 연필을 꺼내고 있었다. 또한 기관사는 특수한 무선 조작을 통해 차장의 회화를 몰래 엿듣고 있었으며, 무선 통화가 시작된 뒤 사고현장의 커브에 접어들 때까지 약 40초간 아무런 운전 조작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사고조는 기관사가 통화내용을 메모하려 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원래 제동을 걸어야 할 지점에 접어들어서도 제동조작을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커브 진입시의 제동조작에 놀란 모습이 없이 평상시처럼 습관적으로 행했다고 생각되며, "기관사는 전동차가 기운 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라는 승객의 증언으로 보아 기관사는 사고 순간까지 위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고가 발생한 커브 구간도 사고 당시의 속도로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사고에 대해 많은 문제가 지적되었다.
이 사고에 의해 후쿠치야마 선의 다카라즈카 역 ~ 아마가사키 역 사이에서 운전이 운휴되었다. 또한 해당 노선을 경유하는 형태로 운행되고 있는 특급 열차도 일부 구간만 운행되었다. 국토교통성은 최저 조건으로서 이 구간에 ATS-P를 설치하지 않는 한 운전 재개를 인정하지 않을 방침을 밝혔다.
복구공사는 같은 해 5월 31일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같은 해 6월 7일부터 시운전을 개시했다. 2006년 3월까지의 잠정 운전 시각표를 제출하여 같은 해 6월 19일의 시발 열차에 의해 55일만에 모든 노선에서 운행이 재개되었다.
후쿠치야마 선의 운휴기간 중 후쿠치야마 선 연선인 산다·다카라즈카·가와니시·이타미 주변과 오사카·코베 주변을 묶는 경로에 대해 대체수송이 실시되었다.
대체수송이 실시된 노선에서는 사고 이전부터 있었던 기존 이용자에게도 열차·버스의 차내나 역 등이 혼잡하게 되는 등의 형태로 영향을 미쳤으며 골든 위크인 5월 9일부터는 혼잡 완화를 위해 한신 전기철도나 동 노선 방향의 노선 등이 새로 추가되었다.
복구공사는 5월 30일 오전 8시부터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주변 주민의 동의를 충분히 얻지 않은 채 공사를 시작하려 했다는 이유로 일부로부터 항의가 있어 오전 9시경부터 중단되었다. 이후 주민의 동의를 얻어 공사가 31일 오후부터 재개되었으며 6월 3일에 종료되었다.
6월 7일 이후에 행해졌다. 7일에는 주행시험, 8일에는 신형 ATS의 작동 시험이 행해졌다.
JR서일본은 전철이 충돌한 맨션을 매입하여 위령비를 세우는 것과 함께 현장 보존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맨션의 주민 중에는 매입을 바라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맨션 구입시의 가격으로 매입한다는 조건 등으로 2006년 4월까지 보상 교섭은 거의 종료되었다.
또한 JR 서일본은 유족에게 생활비도 임시로 지불했지만, 이것은 사고 발생 수개월 후 중지되었다.
운휴가 무려 2개월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에, 역 주변 상가의 이용자가 격감하여 영업시간 단축·휴업에 의해 매상이 줄어들었다. 후쿠치야마 선 역 주변의 상가가 경영난에 빠져 폐점할 우려가 있다고 보도되었다.
사고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경영진의 인책 사임은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후계인사는 난항을 겪었다. 결국 2006년 2월 1일자로 미나미타니 쇼지로회장과 카키우치 츠요시 사장이 퇴임하고 야마자키 마사오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격되었다. 외부(스미토모 전기공업)로부터 고문으로 구라우치 노리타카를 맞이하게 되었다. 덧붙여 상담역이자 국철 민영화의 주인공으로서 JR서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던 이데 마사타카도 물러났다. 그러나 그 후에 이데 마사타카나 당시의 오사카 지사장인 하시모토 히카루 등 사고에 의해서 인책 사임한 10명이 JR서일본 자회사의 간부로 낙하산 인사로서 임명되고 있었던 것이 밝혀져 유족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데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근교육'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실수를 한 사람에게 제대로 교육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이 몇번이나 계속되는 사람에게 승무를 내려주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한편 사고 당일 사원이 볼링이나 골프를 하고 있던 것 등이 차례로 발각된 일에 대해 "한때 국철이 가지고 있던 악습이 부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것을 완전하게 철거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 해 4월 1일 일본에서 개인정보 보호법이 시행된 직후에 발생한 사고였기 때문에 '부상자에 관한 개인정보를 가족에게 제공해도 되는 것인가'로 현장(병원이나 JR서일본)이 혼란을 겪었다. 후유족이나 매스컴의 비판을 의식한 일본 후생노동성은 법률상의 결론으로 인명과 관계되는 경우(동의 없는) 개인정보 제공은 적법하지만, 현장 수준에서는 그 취지가 충분히 주지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위축 효과에 의해 '(개인정보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무난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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