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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1906년 4월 18일 새벽 5시 12분 북부 캘리포니아 해안을 강타하여[2],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큰 지진과 더불어 며칠동안 화재가 지속되었다.
최소 3000여명이 희생되었고, 샌프란시스코의 80%가 파괴되었으며[3], 22만5천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피해액은 4억달러로 추산되며 보험업계의 추산으로는 2억3천5백만 달러(2005년의 가치로 49억 달러에 해당)한다고 한다.
샌앤드리어스 단층은 태평양 판과 북아메리카 판 사이에서 지체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대륙 변형 단층이다. 이 단층은 주로 오른쪽으로 측면 이동을 진행하며, 그곳에서 서쪽의 태평양 판이 동쪽의 북아메리카 판과 이웃하여 북쪽으로 움직인다. 1906년의 파열은 북쪽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총 476km를 증가시켰다.[4] 이 단층은 남쪽 솔턴호에서 캘리포니아의 길이만큼 북쪽에 있는 멘도치노 곶까지 길이 1,300km에 이른다. 최대 관측 표면 이동은 약 6m 정도 이뤄졌다. 측지학적 수치는 약 8.5m까지 이동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5]
1906년 지진은 리히터 지진계의 발달보다 30년 앞서 일어났다. 현대의 모멘트 규모로 예측할 때 7.7에서 8.25까지가 제시되어 왔으며[6], 가장 널리 수용되는 추정치는 7.8이다.[7] 지진의 주요 진앙지는 머슬락 근처 해안에서 약 3.2km 떨어진 곳이다. 진동은 오리건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느껴졌으며, 중부의 네바다 내륙까지 영향을 미쳤다.[8]
강력한 전진이 20초에서 25초가량 본 진동에 선행하였다. 본 진동의 강력한 요동은 약 42초간 지속되었다. 1906년 지진 이전에 북 캘리포니에 역사적으로 기록된 소규모의 지진이 수십년 동안 있어 왔다. 이전에는 1906년 지진의 전조 활동으로 폭넓게 해석되었으므로, 그것들은 간파되어 왔다. 강력한 계절적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단층 위에 놓여진 해안 만에서 수력의 침식시키는 것에 의한 침식의 결과로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 후반기에 큰 계절적 침전물의 로드가 완료되었다고 간주되어 왔다.
오랫동안 진앙은 현지의 땅 이동의 정도에 대한 증거 때문에, 마린 군에 있는 포인트라이스 지역에 있는 올레마 타운 근처로 간주되었다. 1960년대, UC 버클리의 지진학자들은 진앙이 골든게이트 해협 북서쪽 샌프란시스코 해안 쪽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제시해 왔다.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의한 가장 최신 조사 분석에서는 가장 근접한 진장지가 달리 시티(샌프란시스코에 인접한 교외 지역) 해변에 있는 머슬 락 근처일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해안이 진앙지라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요새에서 조수계로 기록된 현지에서 발생된 쓰나미를 근거로 한다. 당시 파도는 약 8cm가량의 진폭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략적인 기간은 40~60분에 걸친 것이었다.[9]
〈로슨 리포트〉(1908)에서 기록된 진동 강도에 대한 가장 중요한 특성은 강도와 아래의 지질학적 상태와의 분명한 상관 관계였다. 지역들은 근처의 기반암 지역보다 더 강한 흔들림으로 퇴적물로 채워진, 그리고, 지진으로 액화상태가 되었던 이전 만이었던 지역에 의해 발생되는 가장 강한 흔들림이 있는 협곡 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대의 지진 분포 지역 관행은 다양한 지질학적 상태에 의해 형성된 지진의 위험에 대한 차이를 설명한다.[10]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에서 설명한 진동 강도는 샌프란시스코와 그리고 파괴가 일어난 샌타로자와 같은 북쪽 지역에서는 11 단계(Extreme)에 도달했다.
당시, 375명의 사망자가 보고되었다.[11] 부분적으로 차이나타운에서 일어난 수백 명의 사상자들은 무시되거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불확실하며, 대략 최소 3,0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12] 대부분의 사망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발생했지만, 189명은 샌프란시스코 베이 에어리어에서 생긴 것으로 보고되었다. 샌타로자와 새너제이 같은 근처의 도시들도 또한 심각한 손생을 입었다. 몬터레이 군에서는, 어귀 근처의 샐리나스 강의 수로를 영구히 바꿔 놓았다. 이전에는 강이 모스랜딩과 왓슨빌 사이의 몬터레이 만으로 빠져나갔는데, 그것은 6마일 남쪽 마리나 바로 북쪽으로 새로운 수로로 돌아가게 되었다.
41만 명의 인구 중 227,000명과 30만명 사이의 사람들이 이재민이 되었고, 그 중 절반이 만을 건너 오클랜드와 버클리로 대피를 했다. 신문은 골든게이트 공원, 프레시디오, 팬핸들 그리고 잉글사이드와 노스 비치 사이의 해변이 임시 텐트로 덮여있다고 보도를 했다. 2년이 지난 후에도, 이들 이재민 캠프 중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상태로 남아 있었다.[13]
지진과 화재는 캘리포니아의 발전에 장기적이고, 중대한 압박을 남겼다. 재앙이 발생한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서부 해안에서는 인구 41만명의 가장 큰 도시였다. 50년에 걸친 시간동안, 샌프란시스코는 서부의 금융과 무역,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였고, 서부 지역에서 가장 바쁜 항구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태평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고, 그것을 통해 성장하는 미국 경제와 군사력은 태평양과 아시아로 진출하였다. 80% 이상의 도시가 지진과 화재로 파괴되었다. 비록 샌프란시스코는 빠르게 재건되었지만, 재앙은 무역과 공업 그리고 인구 성장을 남부 로스앤젤레스로 바꾸었고, 그곳은 20세기 동안 서부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도시 지역이 되었다. 시의 많은 시인과 작가들은 카멀바이더시로 은둔하였고,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오늘 날에도 화자되는 예술의 식민지를 개척했다는 평판을 얻었다.
1906년 지진을 연구한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앤드루 로슨 교수는 1908년 〈로슨 리포트〉(Lawson Report)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재앙을 일으킨 동일한 샌앤드리어스 단층이 로스앤젤레스 근처에도 지나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지진은 강도가 사진과 영사기로 문서화된 최초의 자연 재앙이었며, 지진학 과학이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발생한 지진어었다. 지진으로 인한 총비용은 2015년을 기준으로 해서, $10,499,259,259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비록 샌프란시스코의 지진의 충격이 가장 유명하긴 했지만, 그 지진은 또한 다른 여러 도시에 상당한 손실을 남겼다. 이러한 도시들 중에는 새너제이와 샌타로자가 있는데, 도심 전체가 아예 파괴되었다.[14][15][16]
지진과 그 여진으로 인한 충격 뿐만이 아니라, 이후 도시를 통제불능으로 만든 화재는 훨씬 더 파괴력이 강했다.[17] 90%의 건물 피해가 실제로 지진 때문에 발생한 화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었다.[18] 3일 만에 가스관 파열로 인해 발생한 30건 이상의 화재가 490개의 시 구역에서 약 25,000 건물을 파괴했다. 이것들 중 가장 큰 화재는 헤이스 가의 한 주택에서 아침을 만드는 한 주부에 의해 우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이후에 ‘햄과 계란 화재’라고 알려졌다. 어떤 것은 방화선을 만들려고 시도한 소방관의 미숙한 다이너마이트 사용으로 시작되었다.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해 폭파시킨 건물 자체도 화재가 일어났다. 총책임자였던 시의 소방서장 데니스 T. 설리번은 지진 초기에 함몰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사망했다.[19] 화재는 나흘 밤낮으로 계속되었다.
화재로 인한 샌프란시스코 부동산을 보상받으려는 피보험자들에게 널리 퍼진 관행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 파괴가 지진이 아니라, 화재 탓으로 돌려졌다. 어떤 부동산 소유주는 천재지변으로 인해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할 것을 우려한 나머지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기 위해 손상된 건물에 불을 질렀다. 미군 통신부대의 레너드 D. 와이드먼 대위는 “이웃사람이 불을 질렀다는 말을 한 소방관에게 제지당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보험을 든 건물이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보고를 했다.[20]
수도관도 파괴되었고, 시 소방당국은 화재를 진압하는데 극히 제한적으로 물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시내 지역 여기저기서 발생한 화재는 거대한 겁화로 확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주민이자, 프레시디오의 사령관이었던 프레드릭 펀스튼 소장은 마지막 수단으로 화약과 다이너마이트 심지어는 대포까지 이용하여 건물벽을 쌓아서 방화선을 만들어 화재를 진압하려 했다.[21] 그러나 이렇게 폭파된 건물 잔해에 불이 붙어서 화재가 확산되기도 했다.
화재로 소실된 가장 큰 랜드마크 중 하나는 팰리스 호텔이었으며, 이후 재건되어 많은 유명인들이 방문을 했다. 1875년 캘리포니아 은행 공동설립자였던 윌리엄 랠스튼의 투자로 지어졌다. 1906년 4월, 엔리코 카루소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샌프란시스코에 내왕하여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했다. 카루소의 카르멘 공연이 있던 다음 날 밤, 카루소는 이른 아침 강력한 충격에 의해 그가 묵고 있던 팰리스 호텔 스위트룸에서 깨어났다.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자필 서명한 사진을 움켜쥐고, 카루소는 도시 밖으로 탈출하려 했다. 처음에는 보트로, 그리고 다음에는 기차로 이동하면서 다시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카루소는 1921년 사망했고, 그의 다짐을 지켰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이동 공연 세트장과 의상 모두를 지진과 화재로 잃어버렸다.[22]
화재로 인한 가장 큰 손실 중의 하나는 과학 실험실에서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캘리포니아 과학 아카데미의 식물원 큐레이터였던 앨리스 이스트우드는 미국의 서부가 화재로 파괴되기 직전 새롭게 발견된 그리고 희귀종이었던 전체 유형의 표본 모음집, 1,500 종의 표본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24] 연구소 전체와 영양학을 연구하던 생화학자 벤자민 R. 제이컵스의 모든 기록은 파괴되었다.[25] 1846년 베어 플래그 반란에서 걸렸던 캘리포니아의 원래 깃발도 이 화재로 파손된 또 다른 보물이다.[26]
시의 소방서장 데니스 T. 설리번은 지진 초기에 중상을 입고, 이후 그 부상으로 사망했다. 임시 소방서장은 강타당한 시외곽 프레시디오에 다이너마이트를 긴급 요청했다. 펀스튼 장군은 이미 그런 상황에서 군 부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경찰관에게 전화를 해서, 그는 유진 슈미트 시장에서 그의 원조 결정에 대한답신을 보냈으며, 그후 근처 앤젤 섬에 있던 군부대를 시내로 이동할 것을 명령했다. 캘리포니아 파우더 웍스(현재의 허큘리스)에서 만을 건너 가져온 폭발물들이 페리로 운반되었다.
첫 며칠 동안, 군인들은 약탈을 막기 위해 거리를 순찰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U.S. 민트, 우체국, 교도소와 같은 주요한 건물을 지켰다. 그들은 소방당국이 불이 진행되는 경로에 있던 건물들을 다이너마이트로 붕괴시켜 방화선으로 만드는 작업을 보조했다. 군대는 또한 시내의 수 만명의 이재들에게 급식과 대피소, 의류를 공급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펀스튼 장군의 탁월한 지도 하에, 4,000 부대 이상을 지휘하는 태평양 지역 총사령관 아돌푸스 그릴리 소장은 그러한 비상사태에 대한 대민지원을 지켜보았다. 1906년 7월 1일, 시 당국이 구호 노력을 시작하였고, 군대는 시내에서 철수하였다.
4월 18일, 피난민들 사이의 폭동과 약탈을 진압하기 위해, 슈미츠 시장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정규 전투경찰과 모든 특별 경찰이 어떤 사람, 그리고 약탈과 관련된 모든 사람 또는 범죄 단체를 사살하도록 내게 승인을 받았다.”[27] 게다가, 약탈에 가담한 군인에 대한 고소도 표면화되었다.[28]
1906년 4월 18일 일찍, 유진 슈미츠 시장은 은퇴한 지 얼마되지 않은 제22 보병연대 에드워드 오드 대위를 특별 경찰관으로 임명하고, 아돌푸스 그릴리 소장과 연락을 담당하게 하고, 제 22 보병연대와 다른 부대와 함께 비상사태에 구호를 담당하게 했다. 오드는 이후 4월 20일 모친에게[29] 슈미트의 사살 명령과 제22보병연대 일부 군인의 비열한 행위에 대해서 긴 편지를 썼다.[28]
재앙으로 인한 부동산 손실은 4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되어 왔다.[30] 보험사들의 사상자들 자료는 2억 3500만 달러로, 2014년 달러로 환산하면, 61억 7000 달러에 상응한다.[31]
정재계의 지도자들은 재건이 몹시 필요한 도시에 외부의 투자가 끊어질까 두려워하며 지진의 영향을 강하게 축소했다.[32] 첫 대중 연설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 조지 파디는 빠른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샌프란시스코가 화재로 파괴된 것이 처음은 아닙니다. 금문교 옆의 도시가 빠르게 재건되어, 우리가 알기도 전에 이전의 위대한 행보를 재개할 것임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33] 지진 그 자체는 그의 연설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참사와 금전적 손실 예상은 조작되었다.[34]
지진 바로 직후 (그리고 그 재앙이 닥친 동안에도) 기획과 재건 계획은 빠르게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도시 재건 기금은 사실상 모든 주요 은행들이 재해 발생지에 있었기 때문에, 방염 금고가 충분히 식어서 안전하기 열리기 전에 7~10일가량 장기적으로 기다릴 것을 요구하면서 즉각 묶여버렸다. 이태리 은행은 자금을 피신시켰고, 직후 즉각적인 유동성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 은행장 또한 즉각적으로 초기의 재건 재료를 제공했던 워싱턴과 오리건의 목재소로부터 싣고 온 목재를 적재한 2개의 화물선의 파견을 위해 자금을 대주고 배를 임대해 주었다. 1922년, 이태리 은행은 개명을 했고, 현재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이름을 알려지게 된다.
초기의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지진이 일어났던 당시 스탠퍼드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그 지진 참상을 직접 살펴보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했다. 그는 생존자들의 긍정적인 태도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만들고, 즉각적으로 수리를 하는 속도를 인상 깊게 보았다.[35] 이것이 그의 〈기억과 탐구〉(Memories and Studies)라는 저서에서 ‘지진의 정신적 영향에 대해서’(On some Mental Effects of the Earthquake)라는 장을 만드는 토대를 만들었다.[36]
H. G. 웰스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 대해 점심 때 알게 되었을 때는, 그가 미국에 처음 방문하여 뉴욕에 막 도착했던 때였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그가 떠올린 것은 대재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의 어떠한 전조로도 어떤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오늘 오후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으며, 어느 누구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두 클럽에서 말을 하고, 들은 적이 있으며, 차를 탄 사람들과 거리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차이나타운이 영원히 치워질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주요한 근심은 밀레의 ‘괭이를 든 남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액자에서 도려낼 거다”라고 걱정스런 투로 말한다. ‘그렇지’ 그러나 샌프란시스코가 재건될 수 있고, 곧 더 크게, 더 좋게 될 것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끝없는 대범함으로 나를 사로잡은 이모든 뉴욕의 것들이 그 자체로도 대단한 폐허였던 것이다. 난 이 사람들이 그 상황의 절반 이상이라는 것을 믿는다.[37]
규모가 더 큰 시 단위의 재건 계획은 동부의 자금원으로부터 투자를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급락과 지진의 축소, 튼튼한 새 건물 규약, 그리고 공식적인 사망자 수의 축소와 같은 민감한 행위로 이어지는 평판과 같은 것이 필요했다. 더 유명하고 야심찬 계획 중 하나는 명성있는 도시 설계자인 대니얼 번햄으로부터 나왔다. 그의 대담한 계획은 다른 제안들 중에서 하우스만 스타일의 거리, 넓은 가로수길, 시내를 가로 질러 퍼지는 동맥 같은 도로, 고전적 구조를 가진 대단위 시민 센터 단지, 꼭대기에 큰 신전을 가진 트윈 픽스에서 머시드 호로 뻗어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공원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진의 여파로 기각되었다.
예를 들어, 부동산 투자자와 토지 소유자는 그런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시당국이 매입해야 하는 넓은 면적의 땅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반대했다. 도시 설계자들은 이와 같이 당시에 중국인 인구를 없애고, 중국인들이 그곳의 과세자들이 되어 기여를 할 수 있도록 차이나타운(그리고 다른 빈민들도)을 카운티 외곽으로 보려고 시도했다.[38] 중국인 거주자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대신 설득을 했다. 차이나타운은 새롭고, 현대적으로, 오늘 날 존재하는 것처럼 서구적 형태로 재건되었다. 시청과 기록실의 붕괴는 〈중국인 배척법〉이라는 뒷문을 만들어 중국에서 친척들을 데려와 수천 명의 중국인 이민자들이 주거지와 시민권을 주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39][40][41]
원래 거리 구역이 복원되는 동안, 신고전주의 시민 센터 단지, 더 넓은 거리, 동맥 같은 넓은 도로, 마켓 가를 지나는 지하철, 더 인간 친화적인 어부의 선창, 그리고 텔레그라프 힐 위에 있는 시 기념물과 코이트 타워와 같은 번햄이 무심코 제안한 많은 것들이 빛을 보았다.
지진은 또한 퍼시픽 하이츠 주변을 개발하게 했다. 지진의 막강한 힘은 플러드 맨션을 제외한 놉힐에 있던 거의 모든 주택을 파괴해 놓았다. 파괴되지 않았던 다른 건물은 군대가 방화선을 만들기 위한 소방 작전의 일환으로 다이너마이트로 파괴하였다. 하나의 간접적인 결과로, 부자들이 땅값이 싸고, 비교적 개발이 덜 되었던, 그리고 전망이 더 좋고, 지속적으로 따듯한 기후를 가지고 있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새로운 주택을 개간을 하지 않고, 그리고 낡은 돌을 치우지 않고 만드는 것은 단순히 재건기 동안 텐트 도시에서 새 집을 취득하도록 가속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몇 년후, 놉힙의 부는 퍼시픽 하이츠로 이동하였고, 그곳은 오늘 날까지 남아 있다.
재건은 신속했고, 시의 재건과 폐허에서 일어난 것을 경축하기 위해 개최된 1915년 파나마-태평양 박람회가 시작될 때에 맞춰 1915년경에 대체로 완료되었다.
1915년 이후, 시는 공식적으로 매년 생존자들을 모아서, 재난의 시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고, 정보를 교환하기 위해 모임의 장소가 되었던 시의 금융구에 위치한 로타스 파운틴에서 그 재앙을 추도하고 있다.
군은 2만명의 이재민을 수용하기 위해 5,610개의 가옥을 레드우드와 전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 이 주택은 존 맥라렌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11개의 캠프로 묶여 있었고, 서로 조밀하게 밀집되어, 재건이 끝날 때까지 한 달에 2달러 월세로 임대되었다. 군이 방대한 양의 올리브색 페인트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집은 올리브 색 단층으로 칠해졌으며, 부분적으로는 혼합된 색을 사용했다. 캠프의 인구가 가장 많은 때는 16,448명이었지만, 1907년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주를 했다. 그 후 캠프는 차고, 창고, 점포 등으로 재사용되었다. 집을 짓는데는 평균 $100가 소용되었다. 한 달에 2달러 임대료는 완전 구매 시에는 $50가 들었다. 대부분의 판잣집은 파괴되었지만, 아직 몇 개는 남아있다. 검소한 67평방미터(20평) 주택이 2006년 60만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매매되었다. 최후의 공식적인 캠프는 1908년 6월 30일 폐쇄되었다.
재앙의 소식이 전해진 지 몇 일만에 전 세계로 소식이 전해졌다. 전 세계에서 5백만 달러 이상의 구호 노력이 전달되었다.[42] 런던에서는 수십만 달러가 모금되었다. 일반 시민들과 사업체들이 많은 돈을 구호비로 기부를 하였다. 스탠다드 오일은 10만 달러를, 앤드루 카네기도 10만 달러, 캐나다 연방도 특별 자금 10만 달러를 보냈으며,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캐나다 은행도 25,000 달러를 보냈다.[42] 미국 정부에서도 1백만 달러의 긴급 예산을 편성하여 음식과 가사 도구 그리고 이재민들이 몇 년 동안 사용할 수 천개의 텐트를 피해 지역으로 보냈다.[43] 일반 시민들과 사업체들이 많은 돈을 구호비로 기부를 하였다. 이러한 구호 노력들이 이재민들이 다시 일어서기엔 충분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 부담은 시의 부자들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책임이 없는 주택 재건을 탐탁스러워 하지 않았다. 모든 주민들은 배급소에서 급식을 받았고, 아이다호나 유타와 같이 원거리 주민들은 샌프란시스코에 구호품으로 철도 당국의 협조를 받아 빵을 보냈다.[44]
휘청일만한 2억 5천만 달러의 보험료 지급 요청에 대응하여 보험사들은 2억 3500만 달러에서[45], 2억 6500만 달러를 지급했다. 어떤 것은 단순히 화재로 인한 파손이었다. 왜냐하면,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손실은 대부분의 약관에서 보상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46][47] 137개 이상의 보험사가 직격탄을 맞았으며, 다른 17개 보험사는 재보험사였다.[48] 20개의 회사가 파산을 했고, 대부분의 지진으로 인한 피해 청구는 배제하였다.[47] 런던로이즈는 5천만 달러 이상이 되는 모든 청구를 완전히 지급했으며[49], 하트퍼드에 있던 보험사들도 모든 청구를 완전 지급했다. 하트포드 화재보험이 천백만 달러를, 에트너 보험이 거의 3백만 달러를 지급했다.[47]
보험업계로서는 단일 사건으로 그 지진은 2001년 9월 11일 최악의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오기 이전에 경험한 최악의 사건이었다.1906년 지진 이후, 화재보험 약관 상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지진을 배제한 것에 대한 세계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러한 논의는 재보험들자에 의해 미리 진압되었다. 그들의 목적은 보험 약관에서 세계적으로 지진 위험에 대한 단일한 해법을 도출하는 것이었다. 1910년까지, 유럽의 몇 개국에서는 모든 보험 약관에 지진 위험에 대한 배제를 따랐다. 미국에서는 전혀 다르게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미 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일반 대중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1909년 8월 1일, 캘리포니아 상원은 캘리포니아 화재 보험 표준 약관을 법제화했지만, 그것에는 지진 조항은 포함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캘리포니아 주는 지진에 동반한 화재가 발생한다면 보험사들이 다시 지급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지진으로 위협을 받는 다른 나라들이 캘리포니아의 사례를 따랐다.[50] 보험금 지급은 국제적인 금융 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유럽 보험사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보험계약자에게 전달된 금의 이송은 이자율을 높였고, 그 결과 유동성 부족을 유발시켜서, 마침내는 1907년 공황을 유발한 1907년 10월 니커보커 신탁회사의 위기를 초래했다.[51]
‘1906년 100주년 연맹’(1906 Centennial Alliance)[52]이 여러 100주년 기념 추도 행사의 홍보 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이러한 추모식은 시상식, 추도 예배, 내셔널 지오그래픽 TV의 영화[53], 코이트 타워에 불 쏘기[54], 추도식과 강연으로 구성되었다. 미국 지질조사국의 지진 위험 프로그램은 여러 건의 인터넷 문서를 출판했고[55], 관광업계도 100주년 기념행사를 판촉했다.[56]
109세의 어마 메이 웨일리(Irma Mae Weule, 1899년 5월 11일 – 2008년 8월 8일) 등 1906년 11명의 지진 생존자들이 2006년 100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다. 비비언 일링(Vivian Illing, 1900년 12월 25일 – 2009년 1월 22일)은 그녀의 사망 당시 108세의 나이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여성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았던 최후의 인물이었던 허버트 햄롤(1903년 1월 10일 – 2009년 2월 4일)도 사망 당시의 나이가 106세였다.
햄롤의 사망 직후, 2명의 생존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윌리엄 델 몬트는 당시 103세였고[57], 지네트 스콜라 트래파니(1902년 4월 21일 ~ 2009년 12월 28일)는 당시 106세로 당시의 상처가 너무 깊어서 추도식에 불참했다고 말했다.[58] 델 몬트와 다른 생존자 로즈 클리버는 당시 106세로, 2009년 4월 18일 지진 103주년, 지진 화합 축하식에 참석을 했다.[59] 클리버(Cliver, 1902년 10월 9일 ~ 2012년 2월 18일)는 2012년 2월에 10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낸시 스토너 세이지( Nancy Stoner Sage, 1905년 2월 19일 ~ 2010년 4월 15일)는 105세의 나이로 104주년 기념식(2010년 4월 18일) 사흘 전에 콜로라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델 몬트는 로타 제단 행사에 2010년 4월 18일 참석했고, 그 전날 밤에 존스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60]
페블 비치 주민 루스 뉴먼은 113세로 가장 고령의 생존자로 여겨졌으며[61], 109세 윌리엄 델 몬트가 그 다음의 남성 생존자로 간주되었고, 뒤를 이어 2012년 5월에 사망한 107세의 조지 퀼리치(1905년 4월 26일 ~ 2012년 5월 31일)였다.[62] 다른 생존자로는 리베라 암스트롱(1902년 9월 28일 ~ 2007년 11월 27일)이 있었는데, 2006년 행사에 참석했고, 2007년 10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63]
2005년, 미국 국립영화등기부(National Film Registry)는 지진 직후 보도된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화재〉(San Francisco Earthquake and Fire, April 18, 1906) 뉴스 영화 다큐멘터리를 미국의 보존 가치가 있는 목록으로 추가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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