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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왕비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인열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년 8월 16일(음력 7월 1일) ~ 1636년 1월 16일(1635년 음력 12월 9일))는 조선 인조의 정비이며, 소현세자와 효종의 어머니이다.
인열왕후 仁烈王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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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왕비 | |
재위 | 1623년 3월 14일 ~ 1635년 12월 9일 (음력) |
전임 | 폐비 유씨 |
후임 | 장렬왕후 조씨 |
이름 | |
시호 | 인열(仁烈) |
휘호 | 정유명덕정순(正裕明德貞順) |
전호 | 숙녕전(肅寧殿) |
작호 |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
신상정보 | |
출생일 | 1594년 8월 6일(음력) |
출생지 | 조선 강원도 원주읍내 우소(寓所) |
사망일 | 1636년 1월 6일(음력) | (41세)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창경궁 여휘당 |
가문 | 청주 한씨 |
부친 | 서평부원군 한준겸 |
모친 |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 |
배우자 | 인조 |
자녀 | 4남 (6남 1녀)
소현세자 · 효종 · 인평대군 · 용성대군 |
능묘 | 장릉(長陵)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
본관은 청주이며, 1594년(선조 27년) 7월 1일, 강원도 원주의 우소(寓所, 임시로 거주하는 곳)에서 당시 원주목사로 부임중이던 아버지 서평부원군 한준겸과 어머니 회산부부인 창원 황씨의 2남 4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지 40일 만에 어머니 황씨가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신씨 부인이 양육하였다.[1]
인열왕후의 할머니인 신금희와 외할아버지인 황성은 태종의 왕자인 효령대군의 5대손이며, 인열왕후의 부모는 효령대군을 공통 조상으로 하는 6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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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광해군 2년) 9월, 선조의 손자이자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인조)과 길례를 올리고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에 봉해졌다. 이 시기에 장남 왕(소현세자)과 차남 호(효종), 3남 요(인평대군)를 낳았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으로 남편 능양군이 즉위하자 한씨 또한 왕비로 책봉되었다.[2] 1624년(인조 2년), 당시 용성대군을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목왕후와 함께 충청도 공주로 피난하였다.[3] 3년 후인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1626년(인조 4년) 1월, 공주를 출산하였으나 반년만에 요절하였고, 1629년(인조 7년), 다섯째 대군을 출산하였으나 역시 요절하였다.
인열왕후는 인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인조가 언관(言官)을 특별히 체직시켰을 때에는 “말이 꼭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간의 이름을 지닌 관직인 이상 처치할 때 공의(公議)를 따르지 않는다면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고 언로(言路)를 막게 될 듯 싶습니다.” 하고 간하기도 하였다.[4]
또한 청렴하고 검소하였으며 엄동설한이나 무더운 여름철에는 위사들이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때때로 음식을 내려 주곤 하였다.[4]
1635년(인조 13년) 12월 4일, 여섯째 대군을 낳았으나 낳자마자 죽었다.[5] 5일 후인 12월 9일, 창경궁 여휘당의 산실청에서 산후병으로 인해 승하하였다.[6] 인조는 인열왕후를 간호했던 의관들을 잡아 문초하였으며 인열왕후의 출산을 도왔던 봉보부인 응옥(應玉)을 유배하였다.
- 중전이 대군의 죽음으로 인해 병이 위독해져, 신시(申時, 오후 3시~5시)에 산실청에서 승하하였다.
- 대신과 예관을 불러 하교하기를,
- "뜻밖에 상을 당하였다. 각사로 하여금 염습할 여러 도구를 준비하도록 하라." 하였다.
-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13년 동안 외정(外政)을 궁내에 들리게 하지 않았고,
- 내정(內政)을 궁밖에 들리게 하지 않았다.
- 상(인조)이 항상 〈복주도(覆舟圖)〉를 감상하고 있었는데, 후가 진언하기를,
- "바라건대 상께서는 이를 보시면서 위태로움과 두려운 바를 생각하시고,
- 애완하는 물건으로만 여기지 마소서." 하였다.
- 상이 간혹 정원을 정비하려 하면, 후가 그때마다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이 역사를 중단하였는데
- 상을 보필하여 내치를 한 것이 대부분 이러하였다.
- 또 정사(靖社, 인조반정)의 거사를 할 때 후가 실로 대모(大謀)에 참여하여 도움을 준 바가 매우 많았다.
시호는 인열(仁烈)이며, '인을 베풀고 의를 따르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공로가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열(烈)이라 한다.[7] 원래 인조는 명헌(明憲)이란 시호를 내리길 원했으나 대사헌 김상헌이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 관원이 아닌 군주의 의향대로 할 수 없다고 하여 인열로 정해졌다.[7]
전호는 숙녕(肅寧)이며, 휘호는 정유명덕정순(正裕明德貞順)으로 아들 효종이 '명덕정순'을, 고종이 '정유'의 존호를 추상하였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長陵)으로 인조와의 합장릉이다. 최초의 매장지에 뱀과 전갈이 나타나고 화재가 발생하는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자, 1731년(영조 7년)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8]
- 광해 때의 옛 궁인 중에 나이가 늙고 죄 없는 사람은 궁중에서 그대로 일을 보게 하였다.
- 그 중에 한씨(韓氏) 보향(保香)이라는 이가 있어 옛 임금(광해군)을 잊지 못하여 때때로 슬프게 울었는데,
- 궁인이 “보향이 옛 임금을 생각하니 변고가 생길까 두렵다.”고 왕후에게 밀고하였다.
- 왕후가 이르기를,
- “이는 의로운 사람이다.” 하고 한씨를 불러 매우 위로하며 이르기를,
- “국가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다.
- 우리 임금이 하늘의 힘으로 오늘 보위에 있지만 훗날 다시 광해처럼 왕위를 잃게 될지 어찌 알겠느냐.
- 너의 마음가짐이 이러하니 내 아들을 보육할 만하다.” 하고 보모상궁에 명하고 후추 한 말을 내려 주었다.
- 한편 밀고한 사람을 불러 종아리를 때리며 이르기를,
- “오늘날 너의 행동을 보니 다른 날의 마음을 알 수 있겠다.” 하였다.
- 이에 한씨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 그동안 불안한 마음을 지녔던 옛 궁인들이 모두 안심하고 복종하였다.
— 《공사견문록》
“ | 아아, '조문하러 온 사람은 문 앞에 와 있고, 축하하러 온 사람은 마을 어귀에 와 있다'는 말처럼[12] 길사와 흉사가 한꺼번에 닥친 날을 당하였다. 슬픔에 가슴 아파하고 기쁨에 노래하면서 중외에 고하는 글을 지었다. |
” |
— 원손의 탄생을 축하하는 인조의 반교문 中 |
“ | 국가에 있어서 계비(繼妃)는 예로부터 해독은 있으나 유익함은 없었다. 나는 이러한 해독이 있는 일을 하여 자손과 신민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삼년상의 제도도 매우 중대하여, 자애하는 아비로서 생각하여야 할 것이기에 |
” |
부모
부군
자녀
손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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