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용 (1870년)
대한제국의 황족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년 7월 23일(음력 6월 25일) ~ 1917년 3월 22일(음력 2월 29일))은 조선의 왕족, 문신, 군인, 친일파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군인, 교육인으로, 고종황제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이다. 본관은 전주로 자(字)는 경극(景極), 호는 석정(石庭) 또는 송정(松亭). 별칭은 무루공자(無淚公子). 영선군(永宣君)의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 고종의 조카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초기에는 반일적 성향이었으나, 만년에는 신궁봉경회 총재를 지냈다.
이준용 李埈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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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 이화문 | |
영선군 | |
재위 | 1907년 ~ 1910년 |
공 | |
재위 | 1912년 ~ 1917년 |
전임 | 이재면 |
후임 | 이우 |
이름 | |
별호 | 자는 경극, 호는 석정, 송정, 별명은 무루공자, 양돼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70년 7월 23일(음력 6월 25일)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종로방 운현궁 |
사망일 | 1917년 3월 22일(1917-03-22)(46세) |
사망지 |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운현궁에서 병사(심장질환 등의 합병증) |
경력 | 형조참의, 승정원도승지, 성균관대사성, 보국숭록대부, 상보국숭록대부, 공(1912~1917) |
부친 | 흥친왕 이희 |
모친 | 풍산 홍씨 부인(생모) 여주 이씨 부인(계모) |
배우자 | 초배 남양 홍씨 부인 계배 광산 김씨 부인 첩실 이옥경 첩실 전순혁 |
기타 친인척 | 당조카 이우, 이진완 |
종교 | 유교(성리학) |
능묘 | 흥원 (興園) |
군사 경력 | |
복무 | 대한제국 육군 |
복무기간 | 1907년 8월 14일 - 1910년 10월 |
지휘 | 대한제국 육군 |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에 이르렀다. 고종의 잠재적 대안자이자 경쟁자였으며,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시키고 완은군, 흥친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기도를 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대원군은 그에게 기대를 걸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했다. 김홍집 내각의 내부협판·통위사 등에 등용되었고,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
1894년 김학우(金鶴羽) 암살 사건의 배후로 몰려 체포, 투옥 후 고문을 받았으며 특사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뒤 주차일본공사(駐箚日本公使)와 그해 11월 27일 육군참장(陸軍參將) 등을 지냈다. 이에 아울러 그는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도 간접 연루되었지만 고종의 다른 대안자와는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왕위에 오르려는 시도를 하여 고종을 긴장시켰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교육, 왕위 계승을 단념하고 계몽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12년 이희 공으로 강등된 아버지 흥친왕이 죽자 준(埈)으로 개명한 뒤 공(公)의 지위를 상속받아 '이준 공'(公)이 되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반외세운동과 반정부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이준용은 과단성이 부족한 고종과 병약한 세자(순종)를 대제할 수 있는 인물로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준용 자신도 청일전쟁 중에 고종을 폐위하고 직접 왕위에 오르려는 정치적 야망을 드러내기도 하였다.[1] 이준용은 국가를 다스릴만한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젊은 인재였기 때문에 흥선대원군과 여러 정치세력들은 그를 계속 신왕으로 옹립하려 하였다.[2] 만년에는 친일적 성향으로 변절했다. 윤보선 가문의 인척으로 윤보선의 동생 윤원선은 그의 서녀 이진완[3]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