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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정치인, 제102대 내각총리대신 (1957–)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이시바 시게루(
2024년 9월 27일,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되었으며,[1][2] 같은 해 10월 1일, 내각총리대신에 선출되었다.[3][4]
1957년 2월 4일, 건설 관료였던 이시바 지로(石破二朗)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지에 대해서는 돗토리현 야즈군 야즈정 출생설, 도쿄도 출생설이 있다.[5] 다만 공식 프로필에서는 돗토리현 출생으로 표기하고 있다.[6]
도쿠가와 이에히로: 돗토리현에서 태어났습니까?
이시바 시게루: 아니요, 도쿄입니다. 태어난 것은 1957년 2월 도쿄이지만, 아버지가 바로 다음 해인 1958년 4월 돗토리현 지사가 되어 내려왔기 때문에, 도쿄에서의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유치원, 소학교(초등학교), 중학교까지는 모두 돗토리입니다.
— 2014년 4월 24일, 정치·경제 평론가 도쿠가와 이에히로(徳川家広)와의 대담 내용의 일부
출생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난 지 1년밖에 안 되어 아버지 이시바 지로가 돗토리현 지사가 되어 돗토리현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이시바 시게루는 대부분의 유년 시절을 돗토리현에서 보냈다.
이시바의 어머니는 국어 교사였으며,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5] 소학교(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일 밤 1시간 정도 위인전을 읽었다.[5] 이후 돗토리 대학 교육학부 부속 중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1979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는 전(全)일본 학생 법률 토론회에서 1등을 했다.
1979년 미쓰이 은행(현재의 미쓰이스미토모 은행)에 입사했다. 이 시기 미쓰이 신탁은행 사장을 지냈던 돗토리현 출신의 도이 쇼자부로는 "1978년 초여름 경에 이시바 지로 씨가 아들 시게루 군의 취업 상담을 하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본인이 지망하는 회사에 취업할 것을 조언했고, 우연히 시게루 군이 입사를 지망했던 회사의 인사 담당 직원이 저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시바 지로 씨와 함께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시게루 군의 학업 클럽 활동 성적이 매우 우수했기 때문에 채용이 쉽게 확정되었는데, 그때 시게루 군의 부모님인 이시바 지로 씨 부부가 크게 안도하던 모습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라고 말했다. 이시바는 도쿄도 주오구에 있는 혼마치 지점에 발령을 받았다.
1981년 아버지 이시바 지로가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의 친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로부터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가라"는 권유를 받고 정계에 입문했다. 1983년 미쓰이 은행에서 퇴직하여 다나카 가쿠에이가 수장인 "목요 클럽"의 사무국에서 근무했다. 이후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돗토리현 전현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나이는 28세로, 전국 최연소 국회의원이었다. 이후 내리 11선에 성공했다.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1위로 당선됐으며, 1990년 중의원 농림수산위원회 이사에 취임했다. 1992년 미야자와 개조 내각에서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을 맡았다. 1993년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 투표에서는 여당인 자민당 소속임에도 불구하고 찬성표를 던졌다. 이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자민당 당적은 유지한 채 무소속 자격으로 출마, 다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선거를 통해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며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였다. 이시바는 호소카와 정권이 추진한 정치 개혁 관련 4대 법안에 대한 자민당의 반대 당론에 반하여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졌으며, 이 때문에 자민당 집행부로부터 징계 처분을 받아 탈당하게 되었다. 이시바는 같은 이유로 당의 징계를 받아 탈당한 니시오카 다케오 등과 함께 "개혁회"를 결성했다. 이후 자유개혁연합을 거쳐 신진당 창당에 참여했다. 그러나 1995년 오자와 이치로가 신진당 당수로 선출되자, 안보 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1996년 제41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탈당, 신설된 돗토리현 제1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과반을 넘는 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돗토리현 제1구에서 이시바에 밀려 낙선한 후보들 중 석패율제를 통한 비례대표 부활에 성공한 후보가 단 한 명도 없을 만큼 이시바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견고한 지지를 유지했다. 이시바는 1997년 3월 자민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2000년 제1차 모리 내각에서 또다시 농림수산성 정무차관에 임명되었고, 2001년 제2차 모리 내각에서는 방위청 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원래 이시바는 농업, 수산업 분야에 정통하여 그 분야를 통해 자신의 기반을 쌓아 왔지만, 이시바 자신이 "국방이 나의 취미 분야"라고 말했듯 "신 국방족"으로 불리며 외교, 안보 분야에도 정통한 정책통으로 알려져 왔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관한 의원 연맹 회장을 맡았으며, 2002년 제1차 고이즈미 제1차 개조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입각했다. 방위청 장관 재임 기간 동안 테러 방지를 위한 법률 제정, 육상·항공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다.
아베 신조의 퇴진에 따른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였고 실제로 후쿠다가 총재에 선출되었다. 이렇게 출범한 후쿠다 야스오 내각에서는 2007년 청(廳)에서 성(省)으로 승격된 방위성의 수장인 방위대신에 취임하였다. 이후 2008년 후쿠다의 퇴진에 따른 총재 선거에는 본인이 직접 출마하여 25표를 얻어 전체 5명의 입후보자 중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2008년 출범한 아소 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에 임명되었다. 이시바의 전임 농림수산대신들 중에는 마쓰오카 도시카쓰(자살), 아카기 노리히코(스캔들에 휩쓸려 경질), 오타 세이이치(쌀 부정 거래 의혹으로 사퇴) 등 상당수가 불상사를 겪었지만, 이시바는 딱히 이렇다 할 불상사는 일으키지 않고 약 1년간 무난히 재임하였다. 그러나 2009년 7월 12일에 실시된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패배하는 등 당내의 위기 의식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총선거가 다가오자 요사노 가오루 재무대신 등과 함께 당내에서 아소 다로 총리에 대한 퇴진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8월 30일에 실시된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의 돌풍에도 불구하고 60%가 넘는 득표를 하며 8선에 성공하였다. 이후 정권 교체에 따른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출범에 따라 농림수산대신에서 퇴임하였다.
2009년 9월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한 이후 열린 200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요사노 가오루로부터 출마를 권유받았고 언론들도 일찌감치 이시바의 출마를 예상했으나, 지난 총재 선거에서 본인의 후보 추천인 명단에 올랐던 20명의 의원 중 13명이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추천인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 출마를 포기하였다. 대신 다니가키 사다카즈 전 재무대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고 실제로 다니가키가 총재에 선출되며 이시바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정조회장)에 기용되었다.[7] 정조회장 취임과 함께 소속 파벌인 누카가파에서 이탈하였다.
2010년 4월 22일, 기자 회견에서는 자민당을 탈당한 요사노 가오루, 소노다 히로유키 등이 참여하는 신당인 일어나라 일본에 대해 "신당 일어나라 일본에 참가한 요사노 가오루와 소노다 히로유키와는 정책적으로 매우 가까운 입장에 있다. 두 사람은 자민당에서 중요 정책의 입안을 함께했고, 앞으로도 같이 가야하는 건 당연하다. 일어나라 일본은 민주당의 과반수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공통되는 만큼 향후 정책 면에서 공동 보조를 취할 일은 많을 것이다"라며 자민당과 일어나라 일본이 함께할 가능성을 시사하였고, 이후 강연에서도 "모두 민주당을 깨부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욕설이나 '배신자'라는 말을 퍼부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함께 맞서 싸울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8] 같은 해 9월에는 자민당 정조회장에 유임되었다.
2011년 9월 당직 개편에 따라 자민당 정조회장에서 퇴임하였다. 후임으로는 모테기 도시미쓰가 임명되었다. 정조회장 퇴임 후에는 소속 파벌인 누카가파에는 복귀하지 않고 같은 해 12월에 파벌을 초월한 정책 연구회인 "사와라비회"를 만들었다. 이후 중의원 예산위원회 자민당 간사, 자민당 안전보장조사회장에 취임하였다.
2012년 9월 10일,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하였다. 9월 26일 실시된 선거에서는 1차 투표에서 입후보자 5명 중 총 199표를 획득하며 1위를 차지했지만 과반 득표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국회의원들만의 투표로 치러진 2차 투표에서는 89표를 얻었지만 주요 파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아베 신조의 108표에 못 미쳐 결국 총재 당선에 실패했다.
자유민주당 총재로 선출된 아베 신조에 의해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이시바가 간사장에 발탁되었다. 이시바는 국정에 전념한 아베를 대신해 당무를 도맡으며 2012년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3년 제23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진두지휘했다.
2014년 9월 3일 제2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 출범에 앞서 아베 총리는 이시바를 신설되는 안보 법제 담당 대신에 임명할 것을 타진했으나, 이시바는 8월 25일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를 사양할 뜻을 밝히고 개각 후에도 계속 간사장 직에 머물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9] 그러나 일본 정계에서 간사장 등 하위 직책이 임명권자의 인사에 제동을 거는 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기에, 닛칸스포츠가 "간사장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인사에 대한 본인의 희망을 말하는 전대미문의 일이 일어났다"라고 보도하였으며, 당내에서도 이시바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인 와키 마사시는 "개인의 의견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각 및 당 조직의 임명권자의 의향에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라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당내 갈등을 막기 위해 본인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는 이시바를 반드시 입각시키기를 원했고, 결국 이시바의 의견에 따라 안보 법제 담당 대신이 아닌 다른 직책으로 입각시킬 것을 타진,[10] 8월 29일에 이시바와 회담한 자리에서 이를 정식 확정했다.[11] 결국 9월 3일에 출범한 제2차 아베 신조 개조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국가 전략 특별 구역) 및 지방 교정 담당 대신 (지방창생담당상)에 임명되었다.[12]
같은 해 9월 30일, 당내 무파벌 의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무파벌 연락회에 참여하였고, 2일 후에 고문으로 취임했다.[13] 이 모임은 2012년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를 지지한 의원들이 핵심이기 때문에 일부 언론이나 자민당 의원들이 "사실상 이시바파"로 간주했지만,[14][15] 이시바 본인은 "무파벌 의원의 공조가 모임의 취지다"라며 이를 부인했다.[16]
같은 해 12월 24일에 출범한 제3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지방 창생 담당 대신 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국가 전략 특별 구역)에 연임되었다.
2015년 9월 8일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각료이기 때문에 출마하지 못했고 결과는 아베 신조 단독 후보로써 아베가 총재에 재선됐다. 이시바는 이후 "각료나 당직자로 있을 때는 총재 선거에 나서지 않는 것이 맞고, 아베 정권의 지지율이 비교적 높은 상황에서 출마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라고 말했다.[17] 다음 날인 9월 9일에는 자신의 파벌을 결성할 뜻을 표명했다. 9월 28일에 "수월회(水月会 스이게쓰카이[*])"를 명칭으로 하는 파벌이 결성, 이시바를 포함한 20명의 의원이 참가했다.[18] 이시바는 파벌 출범과 함께 가진 회견에서 자신이 각료를 지내고 있는 아베 내각을 지탱하는 것과 동시에 아베 신조의 자민당 총재 임기 2기 6년의 기간이 끝날 때까지 시간을 갖고 정책 및 집권 구상을 가다듬겠다는 뜻을 내비치며 "나 같은 사람도 만약 정권을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그것을 목표로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19][20][21]
같은 해 10월 7일에 단행된 제3차 아베 신조 제1차 개조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방 창생 담당) 겸 마을·사람·일 창생 담당 대신으로 취임했다.
이후 2016년 8월 3일 단행된 제2차 개조내각에서 모든 각료 직책에서 물러났다.[22] 이시바는 이후의 인터뷰에서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정권은 없다. 2년 후, 3년 후, 5년 후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는 누군가가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것은 물론, 그 다음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도 자민당이 완수해야 할 책임이다"라고 말했다.[23][24]
각료 퇴임 후에는 중의원 주코쿠 블록 대표로서 당 총무가 되었지만,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 이시바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전직 총무회장 호소다 히로유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8월 29일에 물러났다. 이시바의 후임에는 같은 이시바파 소속인 아카자와 료세가 임명됐다.[25]
2018년 8월 10일에는 9월에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하였다.[26] 이시바는 반(反)아베 노선을 내세우며 아베에 맞섰지만, 결국 당선되지 못했다.
2020년 6월 요미우리 신문에 의하면, 아베 신조의 지지율이 근래에 떨어졌고, 이시바의 인기가 높아졌다고 한다. 설문조사에 의하면 차기 총리의 적임자는 아베를 제외하고 이시바가 1위, 고이즈미 신지로가 2위, 고노 다로가 3위, 기시다 후미오가 4위다.[27]
2020년 9월 1일에는 아베 신조가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의 재발을 이유로 사임할 것을 발표하자 2년 만에 다시 열리는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를 공식 표명했다.[28] 선거 결과 이시바는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에게도 밀린 3위의 득표를 하며 낙선했다.
이 문단은 위키백과의 편집 지침에 맞춰 다듬어야 합니다. (2020년 9월 19일) |
"용기와 진심을 가지고 진실을 말해라", "정책 중에는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는데, 이걸 말하면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에 말하지 말자는 주장은 하지 말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러한 발언은 이시바가 의원이 되기 전에 들은 와타나베 미치오의 강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시바는 이런 와타나베의 말에 대해 "정치의 목적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이며, 선거에 당선되는 것이나 지지율을 높인다고 하는 것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다만 선거에 떨어져서는 다음 시대를 생각할 기회 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대중적 평판이 좋지 않은 진실을 말한다 해도 낙선하지 않을 만한, 자신의 진의를 국민에게 전할 수 있는 성품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어차피 국민들은 어려운 건 모르기 때문에 이것을 말하면 선거에 떨어진다'고 하여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내심으로 국민을 경멸하고 믿지 않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국민을 믿지 않는 정치인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리 없다"고 말했다.[73]
방위청 장관 재임 중이던 2004년 3월 16일, 자위대에 대해 "지금까지 자위대를 은근히 야유하는 표현으로 '자폐대'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폐증 어린이'의 자폐를 써서 '자폐대'이다"라고 말했다.[74] 이시바는 이 발언에 대해 "사람들 중에 그렇게 자위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는 뜻일 뿐이다. 자위대가 안에만 틀어박혀서는 안 된다는 의도였다"고 설명했지만, 자폐증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낸 부적절한 발언이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3월 19일 발언을 사과했다.[75]
2010년 당시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이었던 이시이 하지메가 "돗토리, 시마네는 일본의 티베트"라는 발언을 하자 이시바는 발끈하며 "지방의 사람을 깔보는 사람이 선거를 지휘하는 것이 민주당이 선거를 치르는 방식인가?"라고 비판했다.[76]
2013년 11월 29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특정 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한 반대를 호소하는 국회의사당 주변의 시위에 대해 "지금도 의원회관 밖에서는 '특정 비밀 보호법 절대 금지!'를 외치는 함성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세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좌파든 우파든 오로지 자신의 주장을 절규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정온을 방해하는 행위를 통해 알리려는 행위는 결코 여론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주의 주장을 실현하고 싶다면 민주주의에 따라 자신들의 주장에 공감해주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고 지지 고리를 넓혀야 하는 것인데, 단순히 절규하는 전술은 테러 행위와 그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77] 이러한 발언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지자,[78] 이시바는 12월 2일 또다시 블로그를 통해 "정연하게 진행되는 시위와 집회는 어떤 주장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에 바람직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고 시민의 평온을 방해하는 대음량 스피커를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펴는 기법은, 본래 있어야 할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며 "'테러 행위와 그 본질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부분을 '본래 있어야 할 민주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로 고치겠다"라고 했다. 그리고 "자민당의 책임자로서 미흡한 점이 있었던 데 대해 사과드린다"라고 해명했다.[79] 이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일부를 철회하는 등 진의를 제대로 설명했다"고 말했고, 내각에서 이 법안을 담당하고 있는 모리 마사코 저출산 대책 담당 대신도 "시민의 시위활동은 테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야권은 하나같이 "언어 도단의 폭언"이라며 이시바를 비난했고, 도쿄 신문은 사설에서 "시위 활동이 테러 행위일 수 없다. 시위는 유권자의 의사 표시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헌법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시위가 가지는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무 둔감한 것이고, 정치인으로서 실격이다"라고 비판했다.[80] 그러나 주간신조 등 일부 주간지에서는 발언의 대상이 특정 비밀 보호 법안에 반대하는 시민이 아니라 야마모토 다로의 편지 전달 문제를 발단으로 한 우익 단체의 시위와 혼동한 것은 아닌가 지적하며, 최근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천벌"를 외치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것에 곤혹스러움을 느껴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닐까"라며 이시바를 옹호했다.
2015년 7월 1일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 모임에서 얼마 전 문화 예술 간담회에서 언론사 취재진의 위압적 발언이 문제가 된 일을 거론하며, "자민당이 흔들릴 때는 정책 실패보다는 '뭔가 자민당 느낌이 안 좋구나'라는 국민들의 인식이 점점 퍼져 나갈 때이며 그럴 때마다 자민당이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고 말했다.[81]
2015년 7월 14일, 각의(국무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안보 관련 법안의 심의를 하는 데 있어)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지 여부는 현재 보도 각사의 여론조사를 봤을 때 아직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있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숫자를 보고 나니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단언할 자신이 나에게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82] 이 발언에 대해, 민주당의 에다노 유키오 간사장은 기자단에게 "이시바 씨는 자민당의 중진 중 한 명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보 법안 처리를 강행한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내각 내부 의견 불일치다"라고 비판하며 "이시바 씨는 (표결에) 참가하면 안 된다"라고 말하는 등 안보 관련 법안의 15일 중의원 표결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였다.[83]
2018년 8월 10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 출마 선언 회견에서 중일 관계를 언급하며 "어떻게 상대를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인데, 안보도 그랬다. (방위청) 장관 때에, 중국 인민해방군의 육해공 청년 장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자위대에 국가 기밀 이외의 모든 정보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정보를 그 장교에게 보여주고 난 후, 정말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 하고 있는지 판단해 달라고 그 장교에게 말했다. 이러한 상호 이해, 인식의 공유, 국익을 토대로 한 신뢰 관계의 구축은 비단 중일 관계에 한정된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84]
2019년 4월 1일, 새 연호가 "레이와"로 결정된 것에 관해 "위화감이 있다. '령(令)'의 의미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기자단 대표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이에 대해 산케이 신문은 "이시바가 '령(令)'이라는 글자가 '명령(命令)'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85] 이에 대해 저널리스트인 아리모토 가오리는 "최근 실시된 언론사의 여론조사에서 전체의 70% 이상이 '새 연호에 호감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솔직히 그 70%에 속한 한 사람으로서 지난 해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총리"가 탄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며 이시바를 비판했다.[86]
2019년 8월 23일,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한국 정부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의 파기를 결정한 것에 대해 "한일 관계는 문제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빠졌다. 우리나라가 패전 후 전쟁 책임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았던 것이 여러 문제의 근본에 있으며, 이것이 다양한 형태로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이후의 한일 관계를 재고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나치의 전쟁 범죄를 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별도로 전쟁 책임을 스스로 인정해 온 독일과 우리나라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도 지적했다.[87] 또한 이시바는 "일본에도, 한국에도,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다.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고 과거 오부치 게이조 총리, 김대중 대통령 시절과 같은 좋은 관계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라며 한일 관계 복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88]
실시년도 | 선거 | 대수 | 직책 | 선거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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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 총선거 | 38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56,534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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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 중선거구제 | |||
1990년 | 총선거 | 39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전현구 | 자유민주당 | 82,169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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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중선거구제 | |||
1993년 | 총선거 | 40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전현구 | 무소속 | 137,025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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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중선거구제 | |||
1996년 | 총선거 | 41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무소속 | 94,147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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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00년 | 총선거 | 42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91,163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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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03년 | 총선거 | 43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14,283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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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05년 | 총선거 | 44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6,805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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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09년 | 총선거 | 45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18,121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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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12년 | 총선거 | 46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24,746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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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14년 | 총선거 | 47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93,105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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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17년 | 총선거 | 48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6,425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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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
2021년 | 총선거 | 49회 | 중의원 의원 | 돗토리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105,441 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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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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