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괴벨스
나치 독일의 간부, 정치인, 선동가 /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파울 요제프 괴벨스(독일어: Paul Joseph Goebbels, 1897년 10월 29일~1945년 5월 1일)는 나치 독일의 정치인으로 베를린의 대관구지휘자, 나치당의 최고선전가이자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대중계몽선전국가부의 장관이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가장 가깝고 헌신적인 수행자 중 한 명으로, 그는 그의 대중 연설 내용과 그가 공개적으로 밝힌 견해에서 분명히 드러난 그의 매우 악의적인 반유대주의로 유명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을 포함하여 더 강한 차별을 옹호했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 Paul Joseph Goebbel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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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의 국가수상 | |
괴벨스 내각 | |
임기 |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1일 |
전임 | 아돌프 히틀러 |
후임 | 요한 루트비히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
대통령 | 카를 되니츠 |
독일국의 대중계몽선전국가장관 | |
히틀러 내각 | |
임기 | 1933년 3월 13일~1945년 4월 30일 |
전임 | 신설 |
후임 | 베르너 나우만 |
수상 | 아돌프 히틀러 |
차관 | |
독일국의 베를린 대관구지휘자 | |
임기 | 1926년 11월 9일 ~ 1945년 5월 1일 |
전임 | 에른스트 슐랑게 |
후임 | 폐지 |
신상정보 | |
출생일 | 1897년 10월 29일(1897-10-29) |
출생지 | 프로이센 왕국 라이트 |
사망일 | 1945년 5월 1일(1945-05-01)(47세) |
사망지 | 대독일국 베를린 |
학력 | 본 대학교 뷔르츠베르크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
배우자 | 마그다 괴벨스 |
자녀 | 6명 |
서명 |
작가가 되기를 원했던 괴벨스는 1921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문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24년에 나치당에 가입했고, 나치 북부 지역에서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함께 일했다. 그는 1926년 베를린의 대관구지휘자로 임명되어 당과 당의 계획을 사람들에게 고취시키기 위해 프로파간다(선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한 이후 괴벨스의 선전부는 신속하게 나치 독일 내의 뉴스 매체, 미술과 정보를 장악하고 통제했다. 그는 선전 목적으로 라디오와 영화라는 당시에 새로 등장한 매체들을 이용하는 것에 능숙했다. 당의 선전 주제에는 반유대주의와 기독교 교회에 대한 공격,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국민들의 사기 향상 시도가 포함되었다.
1943년에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총력전'을 시작할 조치를 도입하도록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괴벨스가 말한 조치에는 전쟁 노력에 필수적이지 않은 사업체를 폐쇄하고, 여성들을 징집하여 노동력으로 활용하며, 이전에 징집 면제를 받은 직업을 하던 남성들을 징집하여 국방군에 입대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결국 1944년 7월 23일 히틀러는 그를 총력전을 위한 제국 전권 대사로 임명했고, 이에 따라 괴벨스는 군수품 제조와 국방군에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을 늘리기 위한 조치를 시행했으나, 괴벨스의 이러한 조치는 대체로 실패했다.
전쟁이 끝나가고 나치 독일이 패배에 직면하자 마그다 괴벨스와 괴벨스의 아이들은 베를린에서 괴벨스에 합류했다. 그들은 1945년 4월 22일 히틀러의 지하 벙커의 일부인 포르벙커(Vorbunker)로 이동했다. 히틀러는 4월 30일에 자살했고,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괴벨스가 그를 계승하여 독일 총리가 되었으나, 괴벨스는 이 직책에서 단 하루만을 근무했다. 다음 날 5월 1일, 괴벨스와 그의 아내는 자녀들을 사이안화 칼륨으로 독살한 후 자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