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AI tools
위키백과, 무료 백과사전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년 ~ 1735년 1월 24일(음력 1월 12일))는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후궁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종파는 문정공파이다. 청음 김상헌의 현손이며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녀로 김창국과 그의 부인인 전주 이씨 사이의 무남 2녀 중 둘째딸이다. 1686년(숙종 12년) 입궐, 그해 음력 3월 28일에 숙의에 책봉되어 노비 150명을 하사받았다. 그녀는 숙종의 다른 후궁인 희빈 장씨나 숙빈 최씨 등과는 달리 명문가의 여식으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한 후궁이었다. 입궁 후 3개월 만에 대왕대비인 장렬왕후의 환갑이 된 해를 기념하는 명목으로 1686년 음력 5월 27일 소의(昭儀)로 진봉되고, 같은 해 11월 5일, 장렬왕후의 탄신일을 기념하는 명목으로 귀인(貴人)에 봉해졌다.
1689년 4월 22일, 왕의 동정을 염탐하여 궁중의 기밀을 친정에 알려오고 이모부 홍치상과 작당하여 희빈 장씨의 어머니와 조사석에 대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유포한 죄[1][2]로 폐출되었으며,[3] 그녀의 종조부이자 후견인이었던 전 영의정 김수항과 그녀의 공범이었던 이모부 홍치상은 사형에 처해졌고[4], 그녀의 또 다른 이모부로서 홍치상의 아들 홍태유가 아비의 구명을 위해 죄를 전가하려고 했던 심정보(숙명공주의 아들)도 결국 공범 혐의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 서인으로 강등되어 절도에 유배되었다.[5] 숙종은 그녀의 행위를 조장한 배후로 인현왕후를 지목하여 맹렬히 비판하니 결국 열흘 뒤인 5월 2일, 인현왕후 역시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가로 폐출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음력 4월 12일,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면서 그녀 역시 특별히 귀인으로 복위하였다. 그러나 이해 6월 1일에 인현왕후가 새로이 왕비 책봉식을 받아 다음날 숙원 최씨(숙빈 최씨)는 관례대로 승봉이 되었지만 그녀는 누락되었으며, 단종의 복위 기념으로 정1품 빈 아래의 모든 후궁을 특별히 승봉해준 1699년에도 역시 그녀 홀로 누락되는 수모를 겪었다.
1701년(숙종 27년)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2년간의 투병 끝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이재 황윤석의 《이재난고》의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죽기 전에 숙종에게 자신이 죽으면 희빈 장씨를 복위치 말고 영빈 김씨를 왕비로 세울 것을 청했다고 전한다.[6] 인현왕후의 사후, 소론과 남인은 희빈 장씨의 복위를 기정사실로 여겨 8월 27일에는 희빈 장씨가 같은 국모인 인현왕후를 위해 여느 후궁처럼 재최 기년복을 입는 것이 경악스럽다는 상소가 오르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다음달인 9월, 숙빈 최씨가 숙종에게 인현왕후가 죽은 것은 희빈 장씨의 저주를 받아 시해당한 것이라고 고발하고 민진원 형제가 숙빈 최씨의 고발을 적극 지지하니 숙종은 즉시 제주에 유배 중인 장희재를 사형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틀 뒤 희빈 장씨 역시 자진토록 하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에 대해 소론의 항의가 지극하자 숙종이 희빈 장씨의 친신들을 친히 국문하여 증언을 받아내었으나 소론은 왕이 독단적으로 친국하여 증언을 받아내어 정식 수사절차없이 즉시 처형토록 한 것과 수일에 걸쳐 압슬형을 내려 받아낸 자백이라는 것 등을 이유로 의혹을 제기하니 10월 1일 소론 영의정 최석정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고[7] 좌의정 이세백에게 수사를 지휘토록 하였는데 이세백은 영빈 김씨의 내종숙이다. 10월 7일, 숙종은 대전과 중궁전에서 인현왕후의 저주굿에 쓰인 흉물을 발견하였다고 선언하고 다음날인 10월 8일 승정원에 일러 희빈 장씨의 자진을 명하는 공식 어명을 내렸는데 이에 앞서 빈어(嬪御: 후궁)를 왕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을 세우니[8] 영빈 김씨는 계비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숙종은 1702년 1월 10일 영빈 김씨의 이종아우인 홍태유가 숙종과 여론이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에 대해 감정이 나쁜 것을 기회로 삼아 1689년에 영빈 김씨와 함께 희빈 장씨의 어머니에 대한 추문을 지어내 유포한 죄목으로 사형당했다가 1694년 인현왕후의 복위로 영빈 김씨와 함께 특별히 복관되었던 아버지 홍치상(숙안공주의 아들)의 무고함을 세상에 밝혀달라고 격쟁하니 '홍치상의 죄는 만 번 통분할 일이지만 늙은 공주가 하나 남은 아들을 잃은 것이 가엾어 특별히 복관해준 것인데 그 아들이 감히 멋대로 격고(擊鼓)하여 신설(伸雪)할 계획을 하려 한다.'며 홍치상의 복관을 다시 환수해 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하고[9] 1710년에도 홍치상과 이사명은 영구히 복관치 말라고 재차 명을 내렸으며[10], 1717년에 명을 회수하여 이사명은 특별히 복관해주면서도 홍치상은 복관치 않았을 만큼 반감을 드러냈다.[11] 이는 홍치상과 공범이었던 영빈 김씨에 대한 숙종의 감정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무고의 옥의 여파로 집권당으로 등극한 노론에 의해 남인과 소론이 대거 화를 입던 과정 중 1702년 1월 숙종이 돌연 희빈 장씨의 지지자였던 전 영의정 서문중(소론)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고 소론 대신들을 대거 재등용하여 다시 소론 중심의 정국으로 교체하였는데 이는 희빈 장씨의 소생인 왕세자(경종)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숙종은 처의 3년상을 마치기 전에는 재혼할 수 없다는 국법을 지켜 인현왕후에게 의리를 다하라는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계비 간택을 강행해 1702년 9월 3일 소론 김주신의 딸을 계비로 간선하니 이가 바로 인원왕후 김씨이다. 10월 3일 새로운 국모로 책봉된 인원왕후가 열흘 후인 13일에 친영례로 입궐하자 새로이 왕비가 책봉되면 종1품 이하의 후궁을 승진하는 관례대로 이미 정1품 빈이었던 숙빈 최씨만 제외하고 모두 승봉하였는데 이때는 영빈 김씨도 소외되지 않고 1계급 승봉하여 정1품 영빈(寧嬪)에 봉해졌다. 그녀는 숙종의 후궁들 중 같은 노론인 숙빈 최씨와 신분이 친했는데 이 때문인지 숙빈의 소생인 연잉군을 친아들처럼 대했다고 하고 연잉군또한 어머니라고 불르며 친했다고 한다.
1720년(숙종 46년)에 숙종이 사망하자 관례에 따라 다른 후궁들과 함께 대궐에서 나가 살았다. 숙종의 후궁들은 전 왕대와는 달리 남편인 왕이 살아있어 궁에서 지내면서도 각기 궐 밖 사제를 하사받고 또 그것의 규모와 화려함이 극에 달아 대신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지만[12], 영빈이 나가서 살 사제는 후궁이 살기에 합당치 않을 정도로 허름하여 경종이 특별히 개조해주라고 명하였다.[13] 이에 대해 후궁의 제택을 궁에서 개조해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하니 경종은 민진원의 주장대로 대신 수리비 천금(千金)을 지급토록 하였는데[14] 빠져나간 돈이 2천 금에 이르러 탄핵이 있었지만 경종이 덮었다.[15]
경종 즉위년 12월 14일에 발생한 경종의 급성 중독 사건[16]에 독을 쓴 흉수로 의혹을 받았으나 인원왕후의 비호로 경종이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너무 많아 찾을 수 없다며 사건을 덮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녀의 친족이 대거 연루된 신임옥사로 수년에 걸쳐 거세게 거론되었다가 경종 4년 4월, 그녀의 외사촌아우인 이진검에 의해 그녀가 공개적으로 지목되고 효종이 부왕의 후궁이었던 귀인 조씨를 처형했던 전례를 따라 목을 베어야 한다는 강경 사태가 일어나 인원왕후가 이진검의 고모이자 영빈 김씨의 이모인 이씨(심정보의 아내, 경종의 내종숙모)를 시켜 이진검을 설득토록 하기도 하였다.[17] 이해 8월에 경종이 돌연 급서하여 영조가 즉위하니, 영조는 다음달 즉시 그녀의 혐의를 무혐의로 돌리고[18] 각별한 예우를 올렸다.[19]
1735년(영조 11년)에 영빈 김씨가 67세의 일기로 사망하자 영조는 그녀를 항상 어머니라고 불렀던 각별한 사이였음을 밝히고[20] 영빈의 사당을 봉궁하고[주석 1] 대신들에게 치제[주석 2] 토록 하는 파격적인 행각과 함께 이후에도 수시로 친히 궐 밖 그녀의 사당에 들러 명복을 비는 비정상적인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에게 시호가 내려진 영조 29년(1753년)에는 영빈의 가까운 친족 중에서 벼슬이 없는 자를 모두 등용하라는 명과 함께 영조의 서녀인 화유옹주가 영빈 김씨의 봉사손으로 주어졌다.[21]
그녀의 묘는 영빈김씨묘로, 이를 간축해 흔히 영빈묘라 하며,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에 있다. 1991년 사적 367호로 지정되었다.
친정 신 안동 김씨(新 安東 金氏)
왕가(王家 : 전주 이씨)
Seamless Wikipedia browsing. On steroids.
Every time you click a link to Wikipedia, Wiktionary or Wikiquote in your browser's search results, it will show the modern Wikiwand interface.
Wikiwand extension is a five stars, simple, with minimum permission required to keep your browsing private, safe and transpa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