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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사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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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사(고대 그리스어: Ἔδεσσα)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창시자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재위: 기원전 305년-281년)이 헬레니즘 시대에 설립한, 상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폴리스)이다. 이후에 이곳은 오스로에네 왕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의 오스로에네 속주의 주도로서 계속 역할을 했다. 고대 후기에, 기독교 학문의 유명소 및 에데사 문답학교가 위치한 곳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 기간엔, 에데사 백국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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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부르강의 지류인 다이산강(라틴어: Scirtus 스키르투스[*], 튀르키예어: Kara Koyun 카라 코윤[*])의 기슭에 위치했으며, 고지대에 있는 요새인 샨르우르파성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고대 에데사는 오늘날 터키 샨르우르파주의 우르파(튀르키예어: Şanlıurfa, 쿠르드어: Riha, 아랍어: الرُّهَا ar-Ruhā[*], 아르메니아어: Ուռհա)의 전신 도시이다. 우르파라는 이름은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가 도시를 세우기 이전 이 지역에 대한 시리아어 명칭인 우르하이 혹은 오르하이(고대 시리아어: ܐܘܪܗܝ ʾŪrhāy / ʾŌrhāy)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된다. 셀레우코스-파르티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가 패한 뒤, 에데사는 헬레니즘 문화권과 셈 문화권이 혼합된 문명을 지닌, 오스로에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오스로에네라는 명칭의 기원은 오르하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본다.[1][2]
로마 공화정은 기원전 69년부터 오스로에네 왕국과 이들의 수도 에데사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서기 212년 혹은 213년에 로마 식민지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그곳에 243년 혹은 248년까지 오스로에네 왕이 계속 있었다. 고대 후기에, 에데사는 사산 제국과 영토가 맞댄 로마-페르시아 국경선의 중요 도시였다. 샤푸르 1세 (재위: 240년-270년)의 세 차례나 이어진 로마 영토 침공 당시에 공격을 버텨내기도 했다.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가 발레리아누스 (재위: 253년-260년)를 패배시키고 그를 생포해내는 등, 로마에 전례가 없는 재앙을 가져다 줬다. 고대 후기의 유물인 '라테르쿨루스 베로넨시스'는 에데사를 오스로에네 속주 주도로 언급하였다. 로마의 군인이자 라틴어 역사가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에데사의 거대한 요새 시설들과 359년의 샤푸르 2세 (재위: 309년-379년)의 공격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버텨냈는지 묘사한다.[3]
에데사는 그리스와 아시리아 (시리아)의 신학 및 철학 사상의 중심지였고, 저명한 에데사 문답학교가 있던 곳이었다. 이곳은 비잔티움-사산 전쟁 (602년-628년) 기간에 페르시아 측에 함락될 때까지 로마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이 사건은 부활 연대기에 609년에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의 지배력은 비잔티움-사산 전쟁 때 이라클리오스 (재위: 610년-641년)의 627년 그리고 628년의 승리로 회복되었으나, 무슬림의 레반트 정복 기간인 638년에 라시둔 칼리파에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비잔티움 제국이 몇 번의 실패 끝에 10셉기 중엽에 일시적으로 회복할 때까지 이곳은 로마의 지배권으로 돌아가지 못했다.[3]
비잔티움 제국은 1031년에 이곳의 지배권을 회복했으나, 그럼에도 오래 유지 못하고 11세기가 끝나기 앞서 소유권이 몇 차례 바뀌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 뒤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은 십자군들이 셀주크한테서 차지한 도시인 이곳 에데사를 중심으로 했다. 에데사 백국은 1144년 에데사 공방전까지 잔존했으며, 이 공방전 당시에 장기 토후국의 창시자인 이마드 앗딘 장기가 에데사를 점령했고, 에데사의 마테오가 전하길 여러 에데사인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튀르크계인 장기 왕조의 영토는 1514년 찰디란 전투 끝에 마침내 1517년 오스만 제국에 흡수됐다.